지난 11일자 <한겨레> 사설 <‘사교육 구멍’ 숭숭 뚫린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은 진보언론의 박근혜 정부 교육정책 비판이 지닌 한계점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에 대한 진보언론의 피상적인 비판은 현행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정책의 흐름을 반영하기 보다는, 정부정책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을 부지런히 긁어다 모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설은 지난 3월 4일자 <경향신문>의 이종탁 논설위원이 쓴 <선행학습금지법의 역설>에 비교될만하다. 이 칼럼은 <미디어스>의 외고필진 히요가 쓴 <교육현장 모르고 쓴 경향신문 칼럼 -선행학습금지법, 박근혜가 하니 반대하나?>(링크)를 통해 적절하게 반박된 바 있다. <한겨레> 사설을 비판하는 이 비평기사 역시 히요의 글을 참조할 때 더 확실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 3월 4일자 경향신문 30면에 실린 칼럼
한겨레 사설이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을 비판하는 네 가지 이유
11일자 <한겨레> 사설은 <경향신문>의 이종탁 논설위원의 칼럼에 비해서는 현장의 고등학교 학생들과 학부모 당사자의 고충에 충실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사설은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이 “질병의 원인은 놔두고 증세만 치료하는 대증요법에 그치고 있는 것”이라 진단한다. 그렇다면 <한겨레> 사설이 보는 ‘질병의 원인’이란 무엇일까.
이 사설에서는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이 효과를 거두기는커녕 혼란만 가중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논거로 네 가지가 제시된다. 첫째, 고등학교 3학년의 커리큘럼 문제다. “이과 수학 과목의 경우 대다수의 일반고는 오래전부터 2학년까지 고교 3년 과정을 모두 가르치고, 3학년 때는 문제풀이 중심의 수업을 해왔”기에, “선행학습금지법이 적용되면 3학년 1학기에 그 어렵다는 ‘적분과 통계’와 ‘기하와 벡터’ 두 과목을 동시에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겨레> 사설은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이란 대증요법 이전에 “적분과 통계, 기하와 벡터 과목의 수능 시험 범위를 모두 반으로 줄이거나, 두 과목 중 한 과목만 선택하게 하는 등으로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게 선행”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논거는 “자사고와 특목고(외고·과학고)는 얼마든지 선행학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에서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이 실행된다면 “일반고에는 족쇄를 채우고 귀족학교에는 날개를 달아준 격이니, 안 그래도 심각한 입시 경쟁에서의 불공정 격차가 더 확대될 뿐”이기에, “국가가 정해주는 필수 이수단위를 자사고·특목고도 일반고와 동일하게 맞춘 뒤 선행학습을 금지해야 할 것”이란 것이 <한겨레> 사설의 주문이다.
세 번째 논거는 “학원에서는 (선행학습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한겨레> 사설은 “학원도 선행학습을 규제하지 않는 한 (사교육 선행학습에 대한) ‘풍선효과’만 불러올 뿐”이라 설명한다.
네 번째 논거는 “선행학습금지법을 도입한 취지는 사교육의 폐해를 없애자는 것”인데, 그 효과가 미진하다는 것이다. <한겨레> 사설은 “연 20조원을 넘는 과다한 사교육비는 국가적으로도 큰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효과가 불확실한 선행학습 금지에 매달리기보다는 대학별 논술고사부터 폐지하는 게 합리적”이라 지적한다. 그 근거로는 “교육분야 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학부모와 학생·교사 10명 가운데 8~9명 정도가 논술을 사교육을 가장 많이 유발해 우선적으로 폐지해야 할 과목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이 제시된다. 그렇기에 <한겨레> 사설은 “정부가 나서서 논술부터 없앤다면 사교육 근절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분명히 알리게 돼, 이후 다른 대책들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 결론 내린다.
‘4% 1등급’과 ‘입시’만을 고려하는 비평
▲ 11일자 한겨레 사설
즉 <한겨레> 사설이 제시하는 ‘대증요법이 아닌 질병의 원인’은 과도한 고등학교 커리큘럼, 자사고와 특목고와 사교육의 선행학습, 과도한 규모의 사교육과 논술교육으로 인한 사교육 유발 등이다. 그러나 <한겨레> 사설이 제시한 선행적 대안들도 ‘질병의 원인’이라 말하기는 민망하고 차라리 ‘다른 대증요법’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논거들이 지향하는 교육정책의 흐름에 맞춰져 있지 않고 혼란스럽게 정리되어 있기에, 정부가 치료하겠다고 나선 질병의 증세를 질병의 원인이라 제시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무엇보다 <한겨레> 사설이 보여주는 관점 역시 ‘각 고등학교에서 내신 1등급(4% 안쪽) 내지는 2등급(11% 안쪽)을 받아, 전체 수험생 중 특정 비율에 해당하는 명문대에 진학하려는 입시 경쟁’의 시선에서 쓰였다는 것이 큰 문제다.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이 적어도 그 경쟁을 줄이려는 정책의도를 담고 있다면, <한겨레> 사설의 비판은 그 경쟁구도를 전제한 채 나타나는 파행으로 그 정책을 비판한다.
물론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지금까지 추진된 정책의 경로에 의존한 현실성이 없다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보수정부보다는 개혁정부가 훨씬 더 자주 겪은 바다. 이를테면 참여정부 시절의 효력을 보지 못한 부동산 규제정책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에 대한 비판이 ‘맥락적으로 더 효과있는 부동산 규제의 방법’이 아니라 ‘부동산을 투기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의 시선에서 나왔다면 진보적인 비판이라 보기는 힘들 것이다.
또 이 비유를 벗어나 다시 선행학습금지 시행령 문제로 돌아왔을 때, 이 정책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정책효과를 발생시킬 거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이 근거들을 기각하고 ‘파행’만을 부각하는 <한겨레> 사설의 시선이 입시경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교육문제를 쉽게 풀 수 없도록 하는 어떤 질곡을 보여준다.
가령 사교육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술고사 폐지라는 <한겨레> 사설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이 ‘대증요법’에 불과하다면 이것도 대증요법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이 ‘자기 자녀가 명문대에 가는 정도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중간 정도는 해서 대학은 가길 원하는 유치원/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 학부모’의 불안을 줄여주는 대증요법이라면, 논술고사 폐지는 최상위층 학생들, 즉 ‘다니는 학교 4% 이내(내신 1등급) 성적의, 수험생 숫자 대비 1.5% 이내 정원 명문대를 지망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의 사교육 부담을 경감하는 대증요법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코 한쪽이 한쪽의 선결과제가 될 만한 대안이 아닐뿐더러, 사회구성원 다수를 배려한다면 차라리 전자가 선결과제라 하겠다. 사교육비가 이토록 치솟은 진정한 이유는 상위권의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꼭 명문대를 원하지 않더라도 대학이라도 가려면, 그래서 초중고 때 성적이 바닥을 기지는 않으려면, 특정한 시기부터 시켜야 하는 교육수준‘이 지나치게 상향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자를 선결과제로 내세우는 <한겨레> 사설의 태도는, 진보언론에서 교육문제에 관한 비평을 하는 중년의 칼럼니스트들의 계층성을 의심하게 한다.
▲ 지난 2013년 3월 21일 오전 서울 서강대학교 정문 앞에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주관으로 열린 2013학년도 수도권 15개 대학 논술 및 구술면접 전형 문제 분석 결과 관련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논거들을 보자면 그 ‘계층성’의 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 두 개의 논거는 특성화고 및 자사고와 사교육의 선행학습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사교육의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히요의 기고문을 인용한다면, “공교육 이외의 영역에선 선행학습 자체가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 특정 과목이나 분야에 재미나 재능을 보인 학생이 학교에서 제공하는 수준 이상을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싶을 때 독학 이상의 학습 수단이 금지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인용한다면, “지금 선행학습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개인의 자발적인 진도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도를 미리 빼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하는 조건’을 찾아 없애는 것이다. 즉 타의에 의한 선행학습 압력 요인을 줄이는 것이 선행학습 금지법이 지향해야 할 내용”이다.
진보담론의 교육비평의 기저에 놓인 계층성
학원이 선행학습을 하는 상황에서 공교육의 선행학습이 금지되면 공교육의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시선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 번째 전제조건은 교육의 질은 입시경쟁에서의 성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말이 ‘입시경쟁에서의 성과’지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앞서 말했듯 ‘우리 학교 내신 4% 이내 학생들 중 가능한 다수를 전체 수험생 중 1.5% 이내 명문대 정원 안에 포함시키기 게임’에 가깝다. 비율은 좀 더 확장될 수 있겠으나 본질은 그렇다. 학교가 그 게임에 끼어들어 학생 대다수를 배제하는 것이 공교육 파행의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 전제조건은 선행학습이 학생을 괴롭게 하는 측면은 있어도 기본적으로는 양질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잘못된 상식이다. 선행학습은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는 우수한 학생에게만 양질의 교육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선행학습은 학생의 두뇌 처리 단계를 뛰어넘은 내용으로 그들을 혹사하여 학업 포기자를 양산하는 나쁜 교육이다. 온 국민이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불안감에 빠져 제 자녀를 학습 포기자로 만들도록 종용하는 것이 현재 한국 교육의 비극적 현실이다. 또한 학원 측이 학교 측과 구별되는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행학습의 효과를 장삿속으로 강조하는 ‘공포 마케팅’으로 학부모를 옭아매는 측면조차 있다.
사실 공교육의 역할은 4% 내지 11%를 노리는 학생들은 학원에 가더라도, 나머지 학생들은 사교육 없이 커리큘럼을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입시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더 근본적으로는 중등교육을 대학 입시에 종속된 상태로만 유지하지 말고, 대학진학을 못할 이들에 대해 고등학교 교육만으로도 사회적응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떠한 자질이나 성격을 배양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의 실정에서 대학입시에 관심없는 학생들에게 중등교육의 역할은, 엄기호가 <단속사회>에서 일부 시사하였듯이 '쉬는 시간 10분을 기다리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시간 50분을 견디기', '권력에게 항의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편애와 차별과 모멸을 자신이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기' 등을 훈련시키고, 노동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을 저임금 노동 현장으로 투입시키는 것일 게다. 이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에게 자본에 대한 유일한 저항의 방법은 퇴사일 것이나, 산업예비군이 많은 사회에서 그것은 의미있는 저항의 방식이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자본의 입장에 충실한 이러한 중등교육의 역할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인지가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중등교육의 목표에 해당할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체 게바라가 남미 전역을 해방시키는' 수준의 이상적인 논의로 들리게 된 현실이야말로 현재 교육정책의 파행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즉 <한겨레> 사설이 박근혜 정부의 선행학습시행 금지령을 비판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수용한 그 전제조건들은, 애초에 진보언론이 치열하게 비판하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방책을 모색해야 하는 어떤 것들이다.
특목고와 자사고 문제는 어떠한가. 이들 학교는 애초에 현행 교육과정의 틀을 벗어난 교육시도를 해보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애초 취지는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추진한 혁신고와 대동소이하다.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현행 취지에서 벗어나, 입시에 유리한 커리큘럼을 사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특목고와 자사고에 대한 올바른 규제방안 역시 ‘선행학습 금지’는 아니다. 가령 특목고의 경우 애초 과학·언어 인재를 키우는 게 목적인만큼 특정 과목의 선행이 이뤄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입시위주 교육이라는 파행이 근절되어야 할 세태인데, 이에 대해선 특목고 설립초기처럼, 특목고 학생들이 특성과 관련 없는 과로 진학할 때엔 내신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하여 과학·언어 인재가 아닌데도 명문대를 가기 위해 선택하는 일을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등 학부모 단체 회원들이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들은 이날 감사원에 25개 자율형 사립고에 대한 교육부와 교육청의 예산 지원의 위법성과 적절성을 감사해 줄 것을 청구했다. (연합뉴스)
또한 특목고나 자사고가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는 입시 편중 교육편성을 할 경우 해당 학교에 대해 경고를 하고 거듭 어길 경우 취소 처분을 하여 일반고로 되돌리는 것이 관건이다. 만약 자사고와 특목고가 각기 본래 취지에서 파행 중이기에 일반고도 선행학습금지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모든 학교가 파행을 경쟁하자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한겨레> 사설이 전한 우려의 취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들이 우려하는 바는 이 모든 파행들이 안 고쳐진 상태에서 일반고 선행학습만 금지될 경우 일반고의 고3학생 중 명문대에 갈만한 이들이 고생을 한다는 것일 게다. 또 이들의 고생을 무시한다면 ‘일반고 진학은 대입에 불리하다’는 통념이 중학교 학부모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로 인해 특목고·자사고 선호가 강화되며 황폐화의 악순환이 강화될 거란 우려가 있을 것이다.
특히 서울 및 수도권에서 일반고 황폐화의 문제가 심각하게 진행 중인 것이 사실이니 이도 무시할 견해는 아니다. 그래서 이 총체적 난국의 상황 속에서 정책적으로 가장 먼저 건드려야 할 부분을 고르라면 특목고와 자사고가 취지대로 운영되도록 만드는 일련의 작업들일 것이다. 실태조사 및 경고·취소 조치 이후 일반고에서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을 실시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한겨레> 사설이 이 정도는 얘기했어야 그 우려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겠는데, 논술고사 폐지를 대안으로 제시하거나 사교육에 대한 입시교육 경쟁력의 상실을 우려한 상황은 문제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의심할 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진보언론의 교육비평의 기저에 놓여 있는 계층성, 혹은 그들이 대변하고 있는 집단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서울 및 수도권에 거주하는, 돈이 많지 않아 특목고나 자사고를 노리기는 어렵지만 일반고 진학시엔 4% 안쪽 1등급을 노려볼 만하거나 이미 일반고 안에서 그런 상황에 있는, 그렇기에 대학 입시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의 명문대생이 되기를 열망하는 중고교생’이 그들이다. 진보언론이 청취하는 목소리가 그들 내지는 그들의 학부모라는 점, 혹은 진보언론의 사설·칼럼을 작성하는 이들이 바로 그 계층에 해당한다는 점이 <한겨레> 사설과 같은 비평을 낳는 원인일 듯하다.
진보언론의 비평 바깥에 놓은 현실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이 최선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특목고나 자사고에 자녀를 보내는 부잣집 엘리트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고에서 선행학습 금지를 지금이라도 시행하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다른 맥락들이 존재한다.
첫째는 ‘일반고 황폐화’라는 현상조차 대한민국 전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 및 수도권 이외 지방의 경우 대도시라 하더라도 특목고의 영향력은 제한되어 있고 자사고는 정원 미달인 곳도 많다. 전통적 명문고가 아닌 사립고들이 자사고를 선택했지만 외면받는 상황도 있다. ‘일반고 황폐화’라는 현상은 아무리 크게 잡아도 전체 교육 현장의 50%에 해당하는 현상일 텐데, 이를 ‘일반’으로 놓고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의 효과를 폄하하는 것은 한국 언론의 수도권 중심주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둘째는 ‘일반고 황폐화’라는 현상의 기저에 깔린 문제가 대체 무엇인지를 진보언론의 비평도 잡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언론은 고등학교 3학년의 학습과중에 대해서만 우려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12년 동안 학생들이 학습해야 하는 양이 늘어나거나 어려워진 부분은 없다. 선행학습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학생들이 두뇌 발달단계에 버거운 과정을 공부하며 낙오하는 현상이 가속화되었을 뿐이다.
고등학교 3학년에 배워야 할 교육과정을 일 년 당겨 배우고 고3 때 복습을 시키면 필연적으로 이전 학년에서도 다음 교육과정을 더 당겨 가르쳐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굳이 입시경쟁에서 최상위권을 노릴 의사가 없는 학부모들도 자기 자녀가 학교 수업에 못 따라갈까봐 학원까지 보내가며 고교학습 내용을 중학교 1~2 학년 때 가르쳐야 하는 부조리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는 입시경쟁에서 큰 이득을 얻을 가능성이 낮은 계층에겐 단지 탈락만을 방지하기 위해 교육비용을 끝없이 증대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따라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수업도 하고 수능도 준비하기 어렵다는 입시생 일부의 '현실적 고충' 을 배려하다간 대다수의 학부모가 사교육의 포로가 될 수 있는 지금의 교육문제 전반에 대한 대처가 불가능해진다.
또한 교육 전체가 대학입시를 정점으로 구조화되다 보니 모든 연령대의 교육이 그 자체의 의미를 확보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가령 특정한 일반고가 형편상 명문대생을 전혀 배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경우에도 학교 및 교사 측은 개중 나은 학생들에게 그나마 공부를 조금은 더 잘하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갈 대학을 맞춰서 진학지도 해야만 한다. 그마저도 안 될 이들에겐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며 자더라도 나오라고 독려하는 수준이다.
이러한 독려(?)에 대해 학생들이 나와 봤자 대학갈 거 아니니 잠만 잘 건데 왜 나와야 하느냐 물으면, 교사들도 교과 자체가 입시목적이 없는 이들에게 배울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가 없으니까 중졸의 사회적 고난을 이유로 나오게 설득하는 식이다. 사교육계에서 초등학교 때의 성적이 대학입시에 직결된다는 마케팅을 시작하자, 실제론 그렇지도 않건만 이제는 초등학교에서 약간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 학생들도 입시를 포기하고 학교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것이 현재의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즉 ‘일반고 황폐화’란 현상의 기저엔, 특목고나 사교육의 번성을 넘어 현재의 한국 교육이 입시라는 목적이 없다면 교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학생이 수업에 나와야 할 이유도 없어지는 상황이 깔려 있다. 물론 학부모나 학생의 생각으론 정책적으로 ‘학생 대다수를 위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교육'을 요구하기보다 '내 아이나 나 자신의 학교가 입시경쟁에서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을 바랄 것이다.
▲ 이르면 오는 9월부터 초·중·고교의 '선행 학습'을 금지하는 내용의 '공교육 정상화 촉진·선행교육 규제 특별법'이 지난 2월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러한 개인 차원의 사적 구제에 각급 학교가 경쟁하는 것을 교육의 본령으로, 학생 개개인을 도와주는 것으로 오해하도록 만든 체제를 전반적으로 성찰하지 않고는 교육개혁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선행학습금지 시행령에 관한 논쟁으로만 본다면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가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잡는 격’으로나마 진보언론들보다 오히려 이 문제를 더 잘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견청취도 좋지만 포퓰리즘은 경계해야
진보언론의 교육비평의 계층성을 비판한다면 그에 대한 반박논리가 있을 것이다. 즉 학업 과중을 줄인다는 대안은 상위권 학생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성적권의 학생들이 동의한다는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사실 수능 과목을 줄인다든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학업과중을 줄인다든가, 수능 문제를 쉽게 출제한다는 대안에는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동의한다. 당장의 부담이 덜어지고 여러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가 오게 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와 같은 제안들이 실행되었을 때 나타난 결과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모 소득이 높은 학생만 유리해진다”는 것이었다. 논술이나 입학사정관제 등 다른 입시요소가 강화될 때마다 그에 더욱 잘 대처한 것은 사교육을 많이 받고 조기유학 등 다른 종류의 삶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데 용이한 계층이었다. 심지어는 조기유학은 학생 개개인의 지적 능력 향상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도, 마치 그러한 우둔한 선택을 내린 중산층 이상 부모의 실수를 구제해 주겠다는 듯이 입학사정관제가 등장하였다.
이는 당사자 집단의 의견청취도 필요하지만 그들의 근시안적인 토로를 그대로 받아 안아 정책적 의견으로 포장해서는 곤란하다는 너무나도 하나마나한 이야기의 부문 사례일 뿐이다. 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은 필요하지만 그들이 높은 부동산 문제는 쏙 빼고 얘기하는 법인세 인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은 곤란하며, 영세자영업자를 지원하는 정책도 필요하지만 그들이 ‘갑을관계’ 해소 이전에 아르바이트생의 최저임금을 낮춰달라는 제안을 수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정치개혁 영역으로 오면 국회의원 정수 축소나 국회의원 세비 감소,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등도 그런 종류의 제안에 해당한다.
이런 종류의 포퓰리즘적 제안들은 설령 보수정권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반대할 때 동원된다 하더라도 포퓰리즘일 뿐이다. 정치가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점점 더 흔들리는 한국 사회에서, 진보언론이 ‘박근혜 정부가 그나마 잘하는 것’마저 가려내지 못한다면, 진보언론의 정책비판의 신뢰도도 떨어질 것이고 정파적으로 양극화된 정치토론의 효용성도 의심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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