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에서 26일까지의 신문보도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국가정보원 권 과장 자살 시도 이후 언론보도를 주도하는 것이 <동아일보>이고 여기에 대해 <한국일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모양새다.

국정원 권아무개 과장(51. 주선양 총영사관 부총영사. 4급)은 지난 21일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 "더 이상 조사를 받지 못하겠다"며 뛰쳐나간 후 22일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는 22일 오후 1시 33분경 승용차 안에서 재만 남은 번개탄과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중태에 빠져 있는 그는 24일에 해당 사실이 보도되었는데, 21일 밤 11시 30분부터 22일 새벽 1시 30분까지 두 시간여 동안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고 이 내용은 24일자 <동아일보> 12면에 실렸다.
▲ 26일자 동아일보 6면 기사
<동아일보>는 이 인터뷰 기사를 필두로, 그 후로도 권 과장의 심경과 국정원의 여론을 반영하는 보도를 했다. 25일자에는 권 과장의 유서 내용 일부를 활용하여 1면 기사와 4면 기사에서 국정원의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이날 4면 하단에 실린 <왕재산-일심회 파헤친 최고 블랙요원>이라는 권 과장의 신원에 대한 기사는 그의 과거 공로를 강조하면서 그의 발언에 힘을 싣는 모습이었다.
26일자에서도 <동아일보>는 6면 기사에서 권 과장이 검찰 조사에서 어떤 주제로 충돌을 했을지에 대해 추적해 보는 보도를 하였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여타 보수언론에 비해서도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것이었다. 타 매체는 <동아일보>의 보도를 받아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 볼 때 이 보도 흐름의 물꼬를 튼 24일의 인터뷰 기사에는 의문이 있었다. 만약 자살 시도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검찰에서 아직 조사를 받는 상황인 국정원 간부의 심경 토로가 과연 그 시점에서 인터뷰 거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 과장을 알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가 그 시점에서 당장 보도하지는 않을 생각으로 들어둔 얘기가 사건이 터진 후 인터뷰가 되지 않았겠느냐는 추론이 가능했다. 기자들은 권 과장의 자살시도를 알게 된 것도 <동아일보>가 더 빨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민한 대응이 가능했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 25일자 동아일보 4면 기사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본다 해도 <동아일보> 기자가 권 과장의 동선을 그렇게 정확하게 아는 것이 가능했을지, 그게 아니라 권 과장이 <동아일보> 기자를 불러낸 것이라면 국정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언론에 말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또 자살시도를 하기 전의 권 과장이 <동아일보> 기자에게 심정을 토로하고 유서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비슷한 심정토로를 했다는 점도 석연치 않다.
한 일간지 기자는 "기본적으로 검찰 수사가 끝나야 쓸 수 있다는 건 검찰 논리"라면서 "수사 과정도 감시대상이란 점에서 권 과장 인터뷰는 원론적으로는 기사거리가 맞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기자는 "기사 거리가 맞다 해도 그 시점에 인터뷰가 이뤄진 것도 공교로운 부분은 있다"라고도 평가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문제제기는 <한국일보>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일보>는 25일자 3면 기사인 <자살시도 12시간 전 언론과 인터뷰 왜?… '의문의 행보'>에서 국정원이 권 과장과 <동아일보>의 인터뷰를 기획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에서 <한국일보>는 “국정원은 권 과장이 자살을 시도하기 12시간 전 특정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도록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터뷰 당시 극도의 불안 상태를 보인 그가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사실상 방치한 것으로 드러나 그 배경을 두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또 <한국일보>는 “하지만 왜 현직 국정원 직원이 수사 중인 사안을 두고 특정 언론사와 접촉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국정원직원법 17조는 직무와 관련된 사항을 공표하려는 경우 원장의 허가를 사전에 받도록 하고 있다. 더구나 비밀엄수를 철칙으로 삼는 대공수사국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그의 경력을 보더라도 언론에 대고 사적인 감정을 토로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 25일자 한국일보 3면 기사
이렇게 <동아일보>와 <한국일보>가 한 사안을 두고 대립하는 모양새를 만들어낸 상황은 한국 사회의 언론 지형도에선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동아일보>와 <한국일보>가 특정 사안에서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안에선 그런 경우라도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훨씬 더 선명한 대립에 묻히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일간지 기자는 "장진수 민간인 사찰 폭로 때도 활약한 <한국일보> 법조팀의 공로가 아닐까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 기자는 "보수냐 진보냐 위치에 따라 언론사가 움직인다기 보다, 뉴미디어 시대에도 결국 가장 기본이 되는 취재력이 의제 주도권을 형성하는데 기본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 이 사안을 평했다.
지난 며칠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한겨레>와 <경향신문>등 대부분의 보수언론과 진보언론들은 검찰의 청와대의 채동욱 신상 정보 확인과 채동욱의 비리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국정원 권 과장에 대한 취재에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동아일보>의 ‘국정원 온정론’ 보도에 <한국일보>가 의문을 제기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말하자면 <동아일보> 역시 권 과장의 발언에 반영된 국정원의 내부 분위기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25일자 <동아일보> 사설 <국정원-검찰 싸우다 간첩 놓치고 대공요원 잡을 텐가>는 제목만 두고 보면 매우 보수적인 시선을 드러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보면 “권 과장의 충정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국가정보기관에서 위조문서를 법정에 제출한 것이 드러난 이상, 여기서 수사를 멈출 수는 없다. 휴민트 보호가 국가안보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정원의 과오와 무능을 덮는 구실이 돼선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도 증거조작 의혹을 엄정히 수사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 검찰은 흔들림 없이 진상을 밝혀내고 국정원은 검찰 조사에 최대한 협조를 해야 한다”라며 국정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상식 수준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또 26일자 <동아일보> 6면에 실린 사회부 장관석 기자의 <기자의 눈 : 국익과 법치… 가치충돌이 빚은 비극>에서도 “권 과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이 ‘법의 잣대’로만 바라본다는 말을 수차례 했다. 협조자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팩스 하나를 보낼 때도 추적을 피하고 약속한 시간에 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위조 의혹이 제기된 문서의 입수 경로를 의심하며 요원과 협조자가 서로 짜고 증거를 조작한 것은 아닌지 가리는 일은 검찰의 엄연한 직무다”라고 지적하였다.
결국 국정원 권 과장의 인터뷰를 통해 ‘국정원 온정론’에 불을 지핀 <동아일보>도 이 사안이 권 과장의 논리로만 덮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침 <중앙일보>는 26일자 12면 기사 <"증거조작 물증 여럿 확보" 국정원 윗선 본격 수사>에서 “수사는 권 과장의 진술에만 의존해 하는 게 아니며 여러 물증을 확보하고 있다”는 검찰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결국 이후로도 검찰의 엄정한 수사가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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