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한 대형 커뮤니티에 ‘EBS 다큐프라임 섭외력’이라는 게시물에 올라왔다. 24일부터 26일까지 3부작으로 방송되는 <인간과 애니메이션>의 예고편이 면면이 화려했던 까닭이다.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지브리 등 4대 스튜디오를 모두 직접 방문한 데다 가이낙스, 토에이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를 리 없는’ 애니메이션 제작사까지 등장하자 “이건 꼭 봐야겠다”, “섭외력 대단하다”는 반응들이 줄이어 올라왔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최근 1000만 관객을 돌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본격 애니메이션 탐구’ 프로그램이라는 점도 인상 깊었다.

기자 또한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또 만들 수 있었는지. <미디어스>는 25일 오전, 서울 도곡동 EBS 사옥에서 강영숙 PD를 만나 <인간과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유명 출연진, 많은 분들 도움 얻어 접촉”

- 봄 편성 설명회 때에도 <인간과 애니메이션>은 주요 기대작으로 소개됐다. 장기 프로젝트였을 것 같은데 언제부터 작업에 들어갔나? 제작인력은 어느 정도였나?

작년 4월에 시작됐다. 어떤 맥락에서 프로그램이 기획됐느냐면, 유아용에 치중돼 있긴 하지만 EBS가 애니메이션을 알리는 창구 역할을 오랫동안 해 왔는데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이 어떤 수고를 하면서 만드는지 이 세계를 본격 탐구한 적이 없었다. 보통 산업적 가치 측면으로만 경도돼서 이야기됐다.

저는 ‘애니메이션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을 담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하나의 예술 장르, 문화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포석을 까는 것, 그게 이 다큐멘터리의 기획의도이자 목표였다. 애니메이션은 이런 성격이 있고, 메이저사는 이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런 점을 배워서 해 보자, 이런 취지였다.

제작인력은 똑같다. PD, 작가, 서브작가, AD, 기타 스태프들. 조촐한 인력이다.

- 존 라세터 디즈니·픽사 CCO, 에드 캣멀 디즈니·픽사 CEO, 제프리 카젠버그 드림웍스 CEO,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스즈키 토시오 감독 등 애니메이션계의 유명인사들이 두루 등장한다. 인터넷에서도 ‘다큐프라임 섭외력’ 이런 글이 올라오면서 방송 전부터 화제가 됐다.

저도 그거 봤다(웃음). 그런 질문도 많이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섭외했느냐는.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지브리, 데츠카 프로덕션, 토에이 애니메이션, 선라이즈, 역사 속에 현존하는 유명한 데를 다 다니게 됐는데 거기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디즈니, 픽사는 디즈니코리아가 중간 코디 역할을 했고 국내에서 드림웍스 배급을 하는 CJ가 줄을 놔 주셨고, 지브리는 대원미디어에서 도와주셨다. 국내 애니메이션계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해서 조언을 구했다.

▲ 4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지브리

다리를 놔 주신 CJ, 디즈니코리아나 대원이나 저희 프로그램 기획의도에 깊이 공감했던 것 같다. 애니메이션 환경도, 국민적 인식도 척박한데 이런 걸 다루는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그분들도 한 것 같다.

문을 열기까지 4개월이 걸린 곳도 있고 5개월이 걸린 곳도 있다. 지브리는 원래 외부로 문을 잘 안 열고,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미 은퇴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더 인터뷰 요청이 힘들었다. 대원에서 굉장히 애써주셔서 짧은 시간이지만 감독의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메이저사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건 한국 측 파트너들이 아주 많이 도와주신 덕이다. EBS의 아무개 PD라는 개인 자격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라도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일본의 ‘작가주의’, 미국의 ‘자본과 시스템, 창의적 환경’

- 각 애니메이션사만의 특징이 있었을 것 같다.

일본은 오랜 만화 전통이 있는 나라인데, 일본에 8~9일 정도 간 게 전부지만 가는 곳곳마다 일본 사람들의 DNA 속에 만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랑이 박혀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 정도는 돼야 애니메이션이 사랑받고, 제작자들도 맘 놓고 만드는 나라가 되나 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일본 감독들은 인터뷰할 때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한다. 내가 재밌어하고 좋아하는 걸 만든다”라고. ‘관객들이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채울까’라고 물었을 때 “관객들이 뭘 좋아할지는 관심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걸 만들면 어딘가에는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본다”고 말한 분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해외합작을 중시하거나 콘텐츠 자체의 경쟁력보다 콘텐츠가 가져오는 효과에 신경을 쓰고 있는 분위기라 아쉬웠는데, ‘하고 싶은 걸 한다’는 이런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한국에 대한 조언을 해 달라고 할 때, ‘글로벌’ 이야기를 하면 “도대체 왜 글로벌에 관심을 갖느냐. 그냥 너희의 것을 만들어라.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맞는 걸 잘 만들면, 글로벌은 그 다음에 얘기할 문제지 처음부터 ‘글로벌’할 순 없다”고도 했다. 일종의 작가정신 같은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은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메이저사를 기준으로 하면, 철저히 분업화, 전문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철저하게 작가주의인 일본과 다르다. 그 옛날부터 1초에 24프레임, 30프레임 하면서 완벽한 프레임을 구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오늘(25일) 방송분에는 드림웍스의 <천재강아지 미스터 피바디> 제작장면들이 실제로 나오는데 1주일에 3초 분량을 작업한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장면이 많이 필요하다. 이것도 아이디얼한(이상적인) 상태다. 그나마 돈이 있어야 3초를 만들고, 제작에 4~6년이 걸리는 것이다. 그들의 자본과 시스템, 창의적 환경이 굉장히 부러웠다. 그들의 이면까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중심이다, 기술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을 엔딩멘트로 했는데 애니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맘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 방송분을 보고 ‘애니메이션 너머에 있는 사람 얘기가 더 좋았다, 그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고 피드백해준 분들도 있다.

- 우연하게도, <겨울왕국>이 국내에서 대히트를 친 뒤 <인간과 애니메이션>이 방송됐다. 1편에서도 <겨울왕국> OST 연주 장면, 더빙 장면 등이 나왔는데, 국내 개봉 확정 전에 촬영한 장면인가?

11월 말에 갔을 때 <겨울왕국> 개봉을 앞둔 시점이어서 못 찍고 나중에 한 번 더 가서 촬영했다. 한국에서 <겨울왕국>이 1000만 관객을 넘겼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이 대체 뭐냐’ 하는 물음을 갖게 됐고, 시기적으로 잘 맞물린 감이 있다. 전혀 한국에서의 히트를 예감하고 (<인간과 애니메이션>을) 준비한 건 아니었다.

▲ 1부 '애니메이션, 세상을 사로잡다'에 나온 '겨울왕국'의 안나, 엘사 스케치

- <겨울왕국>의 올라프를 스케치하는 장면, 곰돌이 푸가 움직이는 장면 등이 나왔다. <다큐프라임> 촬영을 위해 애니메이터들이 그려준 것인가?

올라프도 그 자리에서 그린 거고, 곰돌이 푸도 일종의 습작 같은 거여서 해 준 것이다. 전문가라 그런지 금방금방 그려주더라. 영상 클립은 허락을 받고 사용한 거다. (사용 허락 관련 작업은) 방송 1주일 전까지 계속됐다.

다채로운 구성의 2부, 한국 애니메이션을 말하는 3부

- 1부 <애니메이션, 세상을 사로잡다>가 너무 화려해서 2, 3부가 묻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논리적인 구성으로는 애니메이션 원리와 특성, 만드는 사람들의 열정, 애니메이션의 영향력 등을 다룬 2부 <나는 움직이는 것을 사랑한다>가 제일 먼저 왔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한 것은 방송인으로서의 자세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가 궁금한데 갑자기 애니메이션 원리부터 나오게 되면… 더 많은 분들이 프로그램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한 편 한 편 만들었고,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대한민국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를 했고, 그걸 우리가, EBS가 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이쪽에 계신 분들이 <인간과 애니메이션>을 보고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길 바란다.

- 오늘 2부가, 내일 3부가 방송된다. 주요 감상 포인트를 짚어 준다면?

▲ '인간과 애니메이션'의 강영숙 PD
2부에서는 아까 말한, 1주일에 3초 만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이 나오는데 캐릭터, 움직임, 스토리가 어떻게 설득력을 갖추게 되는지가 나온다.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은 세 파트로 나뉘는데 아톰의 성공으로 일본의 로봇 애니가 발전하고 그걸 보고 자란 세대가 과학자가 된 사례 등이 나온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프레드릭 백의 사례도 인상적이다. 4년 7개월 간 2만여장의 원화를 그려서 완성했는데,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애니메이션 10선에 포함된다고 들었다. 캐나다에서는 지금도 식목일에는 꼭 방송되고, 한때 캐나다 전역에 나무 심기 운동도 벌어졌다고 한다.

한국에서 벨기에로 입양된 전정식 감독의 <피부색깔=꿀색>은 다큐+애니를 접목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헤닛 융과 전정식이라는 이름 사이의 간극을 좁혀나가고, 서로를 수용하고 나를 버린 엄마와도 내적 화해를 하고 정체성을 탐구한다. 애니메이션을 갖고 저런 것도 얘기할 수 있구나, 하고 느꼈다.

뒷부분에는 다양한 애니메이션들을 짧게 소개한다. 아마 한 번도 본 적 없으실 거다.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정말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2부는 다채롭게 구성해서 애니의 다양한 세계를 보여준다.

3부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종사하는 여덟 분이 오셔서 얘기를 나누는데,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섭외하는 과정에서 이분들이 서로 처음 보는 사이라는 것 때문에 놀랐다. 애니메이션도 TV, 극장 등 종류가 다양해서 각자의 담론과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에는 ‘서로 무슨 얘기를 하나’ 하는 의문이 나왔지만, 전략과 관심분야가 다르더라도 애니메이션이라는 큰 바운더리 안에서는 한 그루의 나무들이기 때문에 같이 건강하게 자라자면 같이 모여서 얘기해야 한다는 취지로 자리를 만들었다.

<뽀로로>가 첫 테이프를 끊고 <마리 이야기>가 큰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으며 국내 애니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로보카 폴리>, <라바>, <마당을 나온 암탉>도 있고. 근데 극장 애니 하나만 보더라도 그 다음이 없다는 거다. 적어도 한 시즌에 한 작품이 나와서 잘 되어야 유지되는데, 지금은 뚝 끊겼다. 작년 한국에서 개봉된 극장용 장편 애니 109편 중 한국 창작 애니가 고작 3편이다. 딱 답이라고 볼 순 없지만, 전 연령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애니가 매년 1편만이라도 나오면… 우리 기술력이 아주 좋아 잘할 거라고 기대하지만, 좋은 토양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너무 열악하기도 하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더라.

“누가 나를 위해 이렇게 수고를 해 줄까?”

- 3부 <한국, 애니메이션을 말하다>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라고 했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 잘되는 것보다 안정적인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탄생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장 메이저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기획부터 배급, 마케팅까지 할 수 있는 제작사가 요원하다. <소중한 날의 꿈>은 만들어지는 데 11년 걸렷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돈 모아지면 하고, 그러느라고. 문제는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느냐는 토양이 있느냐는 거다. 그래서 3부를 보면 짠하다.

아까 ‘열정’ 얘기가 나왔는데 잘 먹고 잘 살아야 열정도 꽃을 피울 텐데, 열정만 요구한다. 누구나 열정은 다 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 시간과 돈이 많이 들고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장르는 만약 정말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으로 키우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밑이 빠져도 괜찮다는, 오래 기다려주는 마음으로 키워야 한다고 본다. 1~2년 안에, 단박에 되는 일이 아니다. 좀 기다려주는 분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뭐 하나를 만들었는데 흥행에 실패하면 다 없어져버린다. 아예 그 바닥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수년간의 노하우와 실력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특히 이 분야는 더 그런 것 같다. 잘 안 되더라도 실패를 실패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인간과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은 너무 거창하고 큰 말이다. 그럼에도 그 타이틀을 붙인 이유가 그것과 나의 관계가 뭐냐 하는 것들을 해명하고 싶어서였다. 그동안 <다큐프라임>이 다소 아카데믹하게 갔다면, 애니메이션은 사람들이 엔터테인먼트라고 생각하는 만큼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좀 더 쉽고 재미있게 가 보자는 생각으로 만들게 됐다. PD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눈에 띌 수도 있다.

▲ 24일 방송된 EBS '인간과 애니메이션' 1부 '애니메이션, 세상을 사로잡다'

애니메이션은 손끝 하나로 펜 끝 하나로, 자신이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드는 세상이다.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달래준다. 상상하는 것 이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멋진 장르라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애니메이션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열정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제 소박한 꿈이라고 하면, 애니메이션이 이렇게 수고 끝에 만들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저 같으면 죽어도 못할 것 같은데, 그림이 숨을 쉬고 움직이는 것에 환희를 느끼고 관객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한다. 누가 나를 위해 그렇게 수고를 해 줄까? 시청자들도 보시고 저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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