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를 장악하면 일시적으로 정권의 안위와 정치적 목적을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독립을 위해 희생해온 KBS 구성원들에 대한 모욕이자 민주시민의 성숙한 민주의식을 부정하는 행위다. KBS 이사회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마시라.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모조리 태어버리는 권력의 무지와 맹목성을 보면서 할 말을 잊었다."

KBS 정연주 사장은 6일 기자회견에서 작정한 듯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에 대해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다. "KBS 사장의 해임 문제는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직결되는 문제"라면서 감사원 결과에 대한 재심 청구와 법적 대응 의지도 분명히 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1시간 가까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던 정 사장은 1980년 수배시절 당시 돌아가신 어머니가 며칠 전 꿈에 나와 '너무 걱정 말라'며 위로했던 일을 말하던 도중 눈시울을 붉히며 목이 메인 듯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다시 암흑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밝힌 정 사장은 "KBS 구성원들은 방송독립을 위한 선한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 정연주 KBS 사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카메라 기자들이 정 사장의 발언 모습을 취재하고 있다. ⓒ정은경
다음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정 사장의 일문일답.

-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기자회견을 연 이유는.

설마 이렇게 무리한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상식을 믿었다. 지난해 말 확대간부회의에서 분명히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고, 그 입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입장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저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시점이 됐다. 공영방송 독립성이 지니는 가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사장 임기 보장이 필요하다고 봤는데 그것이 무너지는 상황이어서 생각을 밝히는 것이 필요할 때라고 봤다.

- KBS 임시이사회가 8일 열리고 해임안이 상정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사회에서 처리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KBS 이사회는 사외 이사들 11명으로 구성돼 있고 KBS의 독립적인 최고의결기구다. 기본적으로 이사회가 KBS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것을 흔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사회 조치와 관련해서는 변호인단이 법적인 절차를 밟을 것이다.

- 최시중 방통위원장 등 정부와 청와대 쪽에서 구체적인 사퇴 요구를 받은 것은 없나.

작년 연말 대선 이후 저에 대한 사퇴 압박은 공개적으로 있어온 것 아닌가. 사장 퇴출 0순위 등 한나라당 쪽에서 특히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바로는 방송통신위원장이 김금수 전 KBS 이사장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있었고, 그밖에 최근 신임 유재천 이사장도 매우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부드럽게 저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하는 것이 어떻냐고 했다. 이런저런 사석에서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존중하자고 분명히 말해왔다. 규제의 틀을 바꾸고 제도적 장치를 바꾸면 된다. 절차와 제도에 의해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공영방송 사장의 변화를 가져와야지 무리하게 한다면 민주적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다.

-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도 정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데.

노조가 사퇴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은 답을 했다. KBS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해서 사장의 임기가 보장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보고 있다. 노조 집행부와 저는 그 지점에서 견해가 다르다.

- 출국금지 조처로 중국 방문이 무산됐는데.

유감스럽다. 공식적 행사도 그렇지만, 베이징에 KBS 제작진 160명이 나가 있다. 제가 제작진들에게 당부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요즘 나라 안 사정이 어수선해서 국민들 마음이 편치 못한데, 우리 선수단이 좋은 성적 얻어 국민적 축제가 되면 좋겠고, KBS가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오늘(6일) 출국했다면 저녁에 160명과 저녁을 같이 하기로 돼 있었다. 책임자로서 고생하는 후배들을 격려하고 싶었다.

그리고 방송협회 회장단 자격으로 몇개 공식적 행사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출국금지 조처가 갑작스럽게 내려지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하게 돼서 고생하는 직원들에게도 미안하고 국제적인 외교 면에서도 결례가 아닌가 싶다.

- 정부와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보수신문들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편파보도와 좌편향 논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이들의 요구에 대해선 어떤 입장인가.

우리 사회가 이제 성숙하다면 다양성이 확보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KBS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제작진에게 '공영방송은 우리사회 모든 다양한 견해들과 입장들을 담아내는 용광로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KBS가 그렇게 편파왜곡을 하고 편향돼 있다면 어떻게 모든 여론조사에서 신뢰도 1위가 나오겠는가. 무엇보다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돼 있는가를 판가름 짓는 것은 얼마만큼 다양성이 보장되고 그것을 서로 포용하는가다.

- 신재민 문화부 차관 발언 등 대통령의 해임권한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신 차관이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다. 신 차관은 저와 워싱턴 특파원도 같이 했다. 당시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는데 지금은 입장이 어때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왜 KBS 사장 임명시 이사회가 제청하고, 대통령 임면이 아닌 임명인지가 방송법 제정 과정과 역사에 다 녹아있다고 본다.

제 주장은 절차를 만들라는 것이다. KBS 사장의 경우는 정치적 독립성이 생명이기 때문에 사장의 임기를 중간에 그만두게 할 때는 그에 대한 절차와 장치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만 되면 아무 불만이 없다.

방송위원회도 방송통신위원회로 가면서 규제의 틀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방송위원들이 다 그만두고 신임 방통위원이 선임됐다. KBS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규제의 틀을 바꾸고 절차와 제도를 만들어 사장을 해임시키든 뭐든 하라는 것이다. 현행 우리 방송법에는 면권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어차피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판결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만약 해임이 법적, 혹은 절차적 결함이 있어서 무효라는 판정이 나온다면 그것은 KBS의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하는 매우 중요한 판결이 될 것이고, 유효하다는 판정이 나온다면 KBS의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하는 보완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관련해 (장치를) 더 구체화해야 한다. 해임이나 면직을 시킬 때 구체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관된 주장이다.

- 해임이 진행돼 사장이 바뀌면 KBS는 장악될 것으로 보는가.

KBS 구성원들의 방송독립에 대한 치열한 정신과 열정을 믿는다. 역사도 있고 지난 5년 동안 자율과 자유 속에서 더 이상 잃을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 있다고 본다. 후배들을 믿는다. 그들이 지켜낼 것이다.

- 감사원 특감 결과에 대해서는.

▲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정연주 KBS 사장 ⓒ정은경
이번 감사원 지적사항에는 KBS 미래, 공영방송 미래에 심각한 압박 요인으로 작용할 것들이 많다. 인력 구조조정이나 여러가지 간섭적인 조치들이 그것이다. 자꾸 KBS에 직원이 많고 방만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5년 일하면서 느낀 것은 엄청난 신규 인력 요구가 있다는 것이다. 주5일제가 되면서 많은 인력이 추가로 필요했고, 또 엄청나게 많은 뉴미디어가 탄생했다.

KBS는 TV 2개 채널, 라디오 7개 채널, EBS 송출 기능 외에도 국가 기간방송으로서의 책무를 위한 기본 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단순한 숫자만을 가지고 인력 문제를 이야기한다. 언론사, 방송사 일이 벽돌 찍는 공장인가? 지식 노동이고 정신을 소모하는 직업인데 그것을 어떻게 벽돌공장처럼 근무시간 정해놓고 시간이 넘친다, 인력이 넘친다고 주장할 수 있나.

KBS는 1년에 160~170명 정도가 정년퇴직을 하지만 신규 채용은 100명 안팎으로 억제하고 있다. 자연적 감소 형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취재 영역도 늘어나고 뉴스 시간이나 프로그램도 늘어나는 등 신규 인력 증원 요구는 엄청나게 많지만 숫자는 전체적으로 줄여왔다. KBS 상황을 너무 모른다.

KBS가 방만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노력해서 절감할 부분이 있고 인력을 더 효율적으로 해야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물론 노력도 해왔다. 하지만 감사원 특감은 KBS의 입장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어이없는 허위 숫자까지 나왔다. 게다가 마지막 답변서를 감사원에 보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회의를 열어 결정을 했다. 절차상 문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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