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와 촛불시위에 온 국민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보수세력의 개헌 총공세가 시작됐다. 개헌 주장이나 논의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특정 정파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거론하는 수준이었으나, 이제는 여야 정치권 모두가 이에 매달린 양상이다. 이런 분위기에 자신감을 가져서인지 원내 과반수를 장악한 한나라당 국회의장 내정자인 김형오 의원은 ‘연구’의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개헌안 제출과 처리 시한까지 못 박으며 단단히 밀어붙일 태세다. 2010년 6월 전까지 개헌을 끝내겠단다. 여야 모든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모임에 가입해 본격적으로 개헌 논의를 시작했다. ‘촛불혁명의 87년 판’이라 할 수 있는 ‘6·10민중항쟁’을 통해 쟁취한 1987년 헌법을 개악하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이를 저지하지 못하면, 피해자는 결국 촛불시위에 나왔거나 촛불시위를 안방에서 지지했던 서민, 대중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큰 일 났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에 도사린 함정과 위험성을 몇차례 나누어 파헤친다. 촛불들이여, 헌법 119조 2항을 사수하자! <편집자주>

개헌발의 정족수가 넘는 159명이 개헌작업에 사실상 착수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이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는 제헌절 60주년을 하루 앞둔 16일 ‘미래한국헌법연구회’가 출범식을 열고, 개헌 작업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한겨레신문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 모임에는 국회의원 총수의 과반이 넘는 159명(한나라당 83명, 민주당 44명, 자유선진당 10명, 무소속 16명, 친박연대 4명, 민주노동당 1명, 창조한국당 1명)이 참여하고 있어, 개헌안을 발의하고도 남을 숫자일 뿐만 아니라, 여야 모든 정당에서 1명 이상이 참여하고 있어 그 자체로 단순한 헌법 연구모임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 7월17일자 한겨레.

이 모임은 서울에서 지난 6월 10일 ‘1백만 촛불대행진’이 벌어진 그 다음 날부터 활동을 시작해 지난 1개월 동안 여러차례 토론회를 열고, 단순한 '헌법 연구‘가 아닌 사실상의 ‘개헌 작업’에 들어갔다. 연구모임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개헌에 대한 동의’를 전제로 가입이 허용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개헌 작업의 빌미를 준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

유감스럽게도 개헌 논의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고향인 봉하 마을에 내려가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작년,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따로 따로 열리는 데 따르는 여러 부작용을 들어 5년 단임 대통령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제안을 한 것에서부터 개헌 논의가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을 정략적이라고 몰아세운 한나라당이 일단 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계획은 무산시킨 다음,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18대 국회에서 개헌을 마무리 짓자는 여야 합의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바보 노무현’이 엄청난 빌미와 선물을 안겨 준 셈이다. 대선 승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던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속으로 "웬 떡이냐!”며 반색했을 것이다.

▲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중앙홀에서 열린 제60주년 제헌절 경축식에서 김형오 국회의장이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여의도통신

한나라당 세력은 4·19혁명 직후 들어선 뒤 10개월 만에 단명으로 끝난 민주당 정권 시절을 제외하고 헌정 60년 중 50년을 통치해 온 세력들의 정당이다.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고 있다. 10년 만에 정권을 잡은 한나라당 지도부와 국회의장 등도 개헌 시기의 문제에서 약간 견해를 달리할 뿐, 18대 국회 안에 개헌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데는 전혀 이견이 없어 보인다.

개헌 움직임과 관련한 첫 번째 기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개헌 작업의 총대를 맨 것처럼 보이는 한나라당 출신 김형오 국회의장과 이 개헌연구모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구체적인 개헌 마무리 시기까지 못박고 있다.

김 의장은 16일 뉴스전문채널 YTN과의 인터뷰에서 “개헌은 총선이나 대선의 영향을 받지 않는 18대 국회 전반기 2년 안에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겠다. 내년 쯤 하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변호사인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개헌론은 국민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번 개헌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열기가 솟는 개헌이 될 것”이라며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뜨거운 열기가 솟는 개헌이 될까? 단순히 권력구조를 지금의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내각책임제), 혹은 이원집정부제 중의 하나로 바꾸는 문제 때문에 열기가 뜨거울까?

개헌작업 본격화하면 권력구조 논의에만 국한되지 않아

기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지금 국회와 정치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헌 논의는 권력구조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막상 분위기가 무르익고 개헌이 기정사실화되면 헌법 제9장인 경제관련 조항(119조-127조) 전반을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에 입각해 개악하려는 마각을 드러낼 것이다.

그럴 경우, 복당이 결정된 친박연대를 포함한 한나라당 의석수가 200석이 넘는 데다, '원조보수'를 자처하며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의 대선을 통해 재벌들로부터 천문학적인 선거자금과 불법정치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는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이 뜻을 같이하고 전경련과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이 연대하여 총력전을 펼 경우 예상되는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전경련은 오래 전부터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불리는 헌법 119조 2항 등을 폐기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그리고 집요하게 주장해 왔다. 조중동 등 족벌신문들도 시장의 실패 가능성은 안중에도 없고 무조건 재벌들의 편이 되어 '좌파 헌법'이라며 헌법 119조 2항을 폐기하자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런 수구반동복합체의 숨은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 1야당인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도 44명이나 개헌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대선과 총선의 참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민주당과 지도부도 개헌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것이고 촛불시위 등으로 바깥 상황이 좋지 않으므로 국민들의 눈치를 봐가며 추진하자는 태도로 비친다.

대화문화아카데미 2년 동안 차분한 헌법 논의 돋보여

그런데 정략적 냄새가 짙게 풍기는 국회와 정치권에서의 개헌 작업과 달리, 지난 2006년 4월부터 2년 동안 정치학자와 법학자 등 연인원 300여명이 발제와 토론에 참여한 결과가 최근 책으로 나와 국회에서 추진 중인 개헌 작업에 많은 시사점과 함께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아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대화문화아카데미(원장 강대인)가 펴 낸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에는 87년 헌법의 평가, 정부형태 및 권력구조, 남북관계와 통일헌법, 기본권조항, 경제조항, 생명권과 환경권, 지방자치제도, 헌법재판제도를 포함한 12가지 주제로 나눠 진행된 지난 2년 동안의 논의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헌법 각 부문에 관해 나올 수 있는 모든 얘기들이 망라돼 있다고 할 정도로 자세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정리되어 있지만, 의견을 달리하는 참석자들 사이에서도 몇가지 의견의 합치점(컨센서스)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첫째, 개헌(작업)은 신중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둘째, 대통령 5년 단임제가 효율성, 안정성, 책임성을 갖추지 못하는 문제점으로 인해 권력구조 개편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헌법 개정은 신중해야 하며, 특히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 87년 헌법에 대해 긍정적 평가

셋째, 87년 헌법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87년 헌법이 그 이전의 헌법 개정이 독재자의 정권연장 내지 권력 강화만을 목적으로 국민과 국회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것과 달리 제헌 국회이래 최초로 여야합의로 만들어진 헌법이라는 점과 21년 동안 헌법적 안정성이 입증되었다는 사실 외에도 헌법의 체계와 내용 등에서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경제조항에 대한 개정은 정치적인 동기에 따라 부수적으로 이루어지는 식의 개정이서는 결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87년 국회에서 헌법 개정 작업을 할 당시 국회를 출입하고 있던 기자에게는 권력구조를 둘러싼 논의와 논쟁, 각각의 권력구조의 장단점 등이 심도있게 비교되고 논의된 내용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국회 안팎에서 논의되거나 진행되고 있는 권력구조 논의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상과 같은 배경 하에서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진행된 권력구조를 둘러싼 논의의 핵심을 간단히 살펴본다.

대통령제에 관한 발제에서 이정희 교수(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는 “...대통령제로부터 의원내각제로의 권력구조 변화가 민주정치의 공고화로 귀결될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중략) 의원내각제의 채택으로 정치문화, 정치과정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가 가능한 것이지만, 현 시점에서 권력구조를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대통령제하에서 정치문화와 정치제도의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 공고화를 꾀하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이라 할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내각책임제가 대통령제보다 정치의 민주성을 더 반영할 수 있고, 다원적인 사회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는데 더 바람직한 정부형태라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와 전통, 경제사회적 토대와 정치문화적인 여건을 감안할 때 내각제로의 전환이 만병통치일 수 없다.”

내각제 되면, ‘프라이팬’ 피하려다 ‘화덕’ 속으로 들어가는 격이 될 것

87년 개헌작업 당시 헌법개정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남재희 전 의원(노동부 장관 역임)은 그가 쓴 책 ‘아주 사적인 정치비망록’에서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은 ‘프라이팬을 피하려다 화덕 속으로 들어가는 격’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은 “내각제를 반대하는 사람 중에 내각제로 가면 정치부패가 굉장히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으며, 금권정치가 심해져 대한민국은 재벌정치가 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며 내각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대통령 4년 중임제로 갈 때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서두르는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윤 전 의원은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채택할 경우 초반 처음 2년 이후에는 재선에 매달릴 것이기 때문에 5년 임기를 4년 중임으로 바꾼다고 폐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 미래한국헌법연구회 주최로 1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에서 열린 개헌 세미나에서 이준일 교수가 이상민 자유선진당 의원(미래한국헌법연구회 공동대표)의 질문에 답변 하고 있다. 나머지 두 명의 공동대표는 이낙연 민주당 의원(사진 왼쪽)과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왼쪽에서 두번째)이다.ⓒ여의도통신

87년 헌법 조문을 기초한 현경대 전 한나라당 의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4년 중임제를 채택한다 해도 레임덕(절름발이 오리 현상)이 더 빨리 올 수도 있고 두 번 올 수도 있다”며 4년 중임제의 도입에 반대했다. 그는 이어 “또한 직업공무원제가 철저하게 확립되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되지 않는 한, 대통령 중임제를 한다고 하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다음날부터 공무원들은 재선을 준비하게 된다. 이미 지자체장 선거를 통해 그 폐해를 현실로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손봉숙 당시 민주당 의원은 토론에서 “60년 동안에 9개월을 제외하고는 대통령제는 굉장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정착되어 왔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뒤집고 내각제라는 새로운 시행착오를 경험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내각제로의 전환을 반대했다.

현행 헌법도 내각제적 요소 상당히 담고 있어, 운영의 묘 살려야

성낙인 교수(서울대 법대)는 이원집정부제에 관한 발제에서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상당 부분 담고 있는 우리나라 헌정 체제에서는 “헌법 규범 보다는 오히려 헌정 현실에서 얼마든지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이원집정부제)로 운용될 수 있는 것이 또한 제헌 헌법의 규범구조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최장집 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의 대통령제가 지배하는 우리 정치제도와 정치문화의 한계나 문제점에 대한 분석은 타당해 보이나 대안에 대한 그의 언급은 그리 현실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때 나타났고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심화된) 현행 대통령 제도의 문제점은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논의되었던 4년 중임제와 대선·총선 주기의 일치와 같은 변화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중심제의 대안은 의회중심제이다. 그러나 의회중심제가 허약한 정당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한국의 정당체제가 빠른 속도로 사회적 기반을 가지면서 제도화해 의회중심제를 작동시킬 수 있다면, 의회중심제가 민주주의를 위한 최상의 제도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 정당체제의 취약함을 감안하면, 그보다 위험이 적은 프랑스식 준대통령제, 즉 의회중심제와 대통령제를 결합한 혼합형제도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시사In 39호에서 발췌)

87년 헌법, 60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헌정주의 정착에 기여

87년 헌법 평가와 관련, 임혁백 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는 “우리나라에 헌법은 있어도 헌정주의는 없다는 말을 하는데 87년 헌법의 공로가 바로 헌정주의를 정착시켰다는 것이다.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사태나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등에 의한) 3당 합당 등 정치적 위기가 있었지만 그 헌법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 국민들이 이 헌법에 따라서 정치적인 경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현행 헌법의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김홍우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명예회장은 “헌법 논의와 헌법 개정 논의는 구분돼야 한다”며 “헌법 논의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뤄져야 하지만 헌법 개정 문제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서울국제포럼 이사장)는 토론에서 “정치적 이해에 얽힌 정략적 발상으로 개헌 논의를 유발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상당수 국민이 개헌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통합보다는 분열의 계기가 되기 쉬운 일부의 의견이나 입장만을 근거로 한 개헌 논의 역시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의 토론에서 다소 의아스런 발언을 한다. “(개헌과 관련) 정치권은 자제해야 한다는 견해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도움이 안된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정치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지 헷갈린다. 원내 압도적인 과반수를 차지하는 한나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개헌작업에 대해 뭐라고 얘기할지 궁금하다. 정치세력이 개헌을 추진할 때 정파적인 의도 없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김성호 교수(연세대 정외교학과)가 7월 3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헌 작업과 관련 가장 적절한 지적이 될 것 같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담긴 건국헌법을 다시 보자

“촛불의 그림자 사이로 다시 개헌론이 일렁인다. 현행 1987년 헌법의 흠결을 2008년의 촛불로 조명하며 전례 없는 설득력을 갖고 돌아왔다. 하지만 변하는 것이 있으면 불변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입헌민주주의는 가르친다. 아무리 숨 가쁜 개헌논의라 해도 변해서는 안 될 건국헌법 정신에 대한 현재적 의미 부여를 비껴갈 수는 없다.

▲ 7월3일자 동아일보.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진보가 일각에서나마 대한민국 건국헌법을 다시 보기 시작한 건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건국’을 ‘분단’의 원흉으로만 치부하는 구태의연을 벗어 던지고 헌법 그 자체를 읽어 본 것 같아 반갑다. 거기에서 강렬한 통제경제의 원칙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문제의식까지도 일단은 환영한다. 그 진보적 헌법해석이 옳고 그름은 다음 문제다. ‘남한진보’가 드디어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은 것 같아, 바로 그 길 위에서 ‘대한민국 보수’와 만날 수도 있을 거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그에 반해 이번 개헌논의를 선도하는 보수에게는 불안한 구석이 없지 않다. 항상 대한민국을 앞세우는 보수, 그 일각의 개헌론이 과연 건국헌법을 꼼꼼히 읽어보았는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고서야 급진적인 신(新)자유주의 개헌을 어찌 그리 쉽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방임적 자유시장주의가 건국헌법에 반영된 삼균주의(三均主義)의 이상과 부합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시대정신의 제시와 그에 따른 건국헌법의 창조적 재해석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런 속 깊은 고뇌 없이 세계와 시장과 실용만을 되뇔 때, ‘대한민국’은 가고 ‘보수’만 남는다는 우려, ‘딴 나라 보수’라는 비아냥거림을 외면하기 힘들어진다.”

김성호 교수의 논리를 정리하면 이렇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우리의 1987년 헌법은 분명 완벽하지 않다. 정치적 타협과 거래의 산물인 측면도 분명 있다. 그러나 과연 1987년 헌법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노정하고 있을까? 더군다나 개헌이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이미 분열될대로 분열된 우리 사회가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입헌정치의 끝이 단지 권력구조의 재편이라고 믿는다면 큰 오산이다. 토지공개념을 위시한 상당수의 권리 조항, 그리고 역사적 정통성을 적시한 헌법 전문(前文) 및 총강(總綱) 조항 전반 역시 도마 위에 오를 것이 자명하다. 1987년 헌법의 문제가 순식간에 1948년 체제와 통일한국의 문제로 번져 나갈 것은 명약관화하다. 일상 정치로도 이루지 못한 대타협이 입헌정치를 통해 만들어질 리 없다. 더구나 문제의 본질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지 권력구조가 아니다.”

개헌문제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black hole)'이 될 것이다. 몰라서 참여했건, 알고도 참여했건, 국회에서 진행 중인 개헌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의원들, 특히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할 내용이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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