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기자는 한국 사회가 모든 문제에 있어 의혹만 제기되면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여 사안의 승패를 규정하려 하는 ‘타짜’의 망령을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링크) 또한 기자는 ‘채동욱 사건’에서 언론계나 시민사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법정공방의 승패나 진실싸움이 아니라 <조선일보>의 보도 윤리일 거라고 썼다. (링크)

하지만 한국 사회의 시민들의 관심사는 온통 과연 임모씨의 아들이 채동욱의 혼외자식이 맞느냐 아니냐에 쏠려 있는 만큼, 이 사건에 대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대처가 적절한 것인지 혹은 용인받을 만한 것인지를 따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채동욱 전 총장은 현재의 민사소송을 취하한 후 유전자감식 이후 가능한 다른 방도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사소송의 경우에도 유전자감식 결과가 없다면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소송을 질질 끌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일 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자는 채동욱 전 총장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에는 당연히 그의 행동이 적절한 것이지만, 사실이 아니라도 용인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혼외정사는 비도덕적인 일이지만 불특정다수가 알아야 할 성격의 잘못이라 보기는 힘들다.
▲ 채동욱 검찰총장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별관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하기 전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뉴스1)
만약 채동욱 전 총장이 임모씨가 소송을 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 모자를 지원하고 가족에게 그 사실을 숨긴 채 살아왔다면 그의 잘못에 비해 충분한 대가를 치르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그의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큰 대가를 치르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한국 사회 현실에서 권력에 떳떳한 검사가 되려면 사생활부터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처세론적 조언을 할 수 있겠고 이도 타당한 지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채동욱 전 총장이 현재 감당하고 있는 몫은 설령 그가 정말로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과도한 것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이 사안은 ‘명백한 공인의 명백한 사생활 문제’에 해당한다.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대체로 ‘명백한 공인’에게는 사생활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이 ‘공인’을 ‘유명인’이라 해석하여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안은 채동욱 본인이 “내 사생활 문제다. 검찰 업무와 상관없으니 답변하지 않겠다”라고 대응했다면 ‘양심의 자유’까지 거론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물론 한국 사회의 여론은 그런 대응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진실 혹은 거짓’을 말하는 방법을 택했다.
여기서 만일 그의 말이 ‘거짓’이라면 이 문제는 ‘명백한 공인의 명백한 사생활 문제에 대한 거짓증언의 문제’가 된다. 이 역시 혼외정사처럼 비윤리적인 일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일이 공직자가 국회에 가서 ‘위증’을 하는 것만큼이나, 또는 공직자가 공적 사업에 대해 잘못되고 편향된 정보를 말하는 것만큼 비윤리적인 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 사실상 개입했으면서도 국회에서 그런 일이 없다고 주장한 신영철 대법관이나, 4대강사업의 효과를 가장하고 폐해는 숨긴 이명박 정부의 관료들이 이보다 훨씬 비윤리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 했을 때에 그것은 가령 ‘클라라의 예능프로그램에서의 거짓말’보다는 훨씬 비윤리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이 밝혀질 경우 그를 어느 정도 수위로 비판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명백하게 밝혀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채동욱 전 총장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그는 임모씨와 모종의 공모상태에서 지금의 일을 벌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가 뭐라고 말하든 임모씨는 유전자감식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 검찰 간부 및 직원들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별관에서 열린 채동욱 검찰총장 퇴임식에서 채 총장의 퇴임사를 경청하고 있다.(사진 맨 왼쪽 여성2명은 채총장 부인과 딸) (뉴스1)
따라서 채동욱 전 총장의 발언이 ‘명백한 거짓말’로 밝혀지는 상황은 그가 바보같은 오판을 하지 않는 이상 오지 않는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은 대중이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경우 우리는 대중이 사생활의 문제를 심증만으로 재단하고 채동욱 전 총장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채동욱 전 총장이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전자감식을 통해 밝혀내고 <조선일보>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장면을 원할 것이다. 기자 역시 그렇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볼 때 이 시나리오 역시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이 시나리오가 성립하려면 채동욱 전 총장은 본인과 내연관계에 있지 않았는데도 웬일인지 임모씨와 공모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혹은 임모씨가 채동욱 전 총장과 공모상태가 아닌데도 굳이 정권과 주류언론사 하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엄청난 도박에 ‘손모가지’를 걸 수 있을 정도의 강단이 있어야 한다. 이 역시 어느 쪽으로든 상상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채동욱 전 총장과 <조선일보>의 진실공방은 결론없이 지나갈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채 전 총장의 주장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내적 확신을 가지는 것은 각자의 자유일지라도, 심증만으로 그의 처신을 비판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실체적 진실의 차원에서 그의 주장이 진실일지 거짓일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어찌됐든 채 전 총장은 정당한 방어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받아야 한다. 그는 '거짓'이라 해도 잘못 이상의 타격을 받았고, '진실'이라 한들 이 사실을 입증하기 힘든 억울한 상황에 처한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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