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됐다. 하지만 가결 여부보다는 그 이전에 오간 논의의 수준이 매우 실망스러웠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 여부를 확정 짓는 자리였지만,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은 없었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에 대한 질의응답에 나선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이석기 의원을 한 번도 의원으로 인정한 적이 없고 악수까지 거부해 왔다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궁예처럼 관심법을 써서 그의 사상적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그 자의적 판단으로 그간 헌법기관의 정당성을 부정해 왔다는 고백이다. 통합진보당의 강령이 자유민주주의에 합치할 수 있는지 판단해 보라고 황교안 법무부장관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황교안 장관조차 검토를 약속할 뿐 즉답을 피할 만큼 민망한 얘기였다.
▲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의원이 4일 오후 본회의를 마친 뒤 굳은 표정으로 동료의원들과 국회 본청을 나서고 있다. 이날 본회의에서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가결됐다. (뉴스1)
설령 공안당국의 혐의가 옳더라도 통합진보당 강령은 헌법정신에 어긋나지 않게 쓰인 것이란 점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폭언이었다. 북한이 남한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주장하면 종북이 된다는 시선이었고, 민중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모순적이라는 허황된 주장이었다. 그들이 늘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결합이 아니라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통합진보당 측 이석기 의원의 신상발언이나 이상규 의원의 황교안 장관에 대한 질의응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차마 전면으로 부인하지는 못한 녹취록은 명백하게 북한이 일으킬 전쟁상황에서 남한 공권력을 타격하거나 교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은 헌정을 유린하는 것이었고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헌정을 유린하는 모의를 구체적으로 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두 의원의 발언은 그 지점은 건드리지 않은 채 일부 구절의 왜곡에 항변했고 지금까지의 모든 내란음모 사건은 무죄로 결론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식이었다. 지금까지의 사건이 조작이라 해서 이 사건도 조작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점을 간과한 ‘언론 플레이’였고, 그들의 행위가 헌정유린인지 여부는 전혀 관심도 없는 모양새였다.
양측의 공방에서 ‘민주주의’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독재세력과 민주화운동세력의 타협적 체제였던 소위 ‘87년 체제’ 이후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시점에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원칙으로 사고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힘의 균형으로 사유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새누리당에게 ‘민주주의’란 ‘할 수만 있다면 민주당 등 ‘종북세력’(그들이 생각하기에)을 정치영역에서 배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킬 따름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민주당 입장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양 세력의 힘의 균형 속에선(물론 새누리당 측이 더 우세하긴 하지만), 민주주의 헌정이 어디까지 용인하고 어디부터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의 문제가 사라져 있다. 그 결과 군소정당들은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되었다. 새누리당은 군소정당들에 대해선 민주당에 대해서부터 훨씬 수월하게 ‘종북’의 딱지를 붙였고, 민주당은 진보정당의 선거출마가 수구세력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게거품을 물었다. 민주주의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원칙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세력균형으로 사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수혜를 받지 못한 정치적 좌파들은 헌정을 우습게 아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이석기 의원과 ‘RO’ 사건에 대해서도 좌파들은 대체로 그 시대착오적인 이념을 정치적으로는 비판하면서도 이를 법리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입장도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헌정을 뒤집는 차원에서의) 혁명을 꿈꿀 권리’와 ‘(역시 그러한) 혁명을 실행할 권리’는 전혀 다른 것이고 ‘RO’ 녹취록의 경우 전자에 해당하는지 후자에 해당하는지가 논점인데, 좌파들은 자신들의 전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다소 과도하게 이석기 의원 등을 법리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체제가 결코 보장해줄 수 없을 후자의 권리까지 보장해주는 것이 민주주의에 부합한 일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얘기들도 나온다.
이는 민주주의, 공화국, 헌법정신 따위의 얘기들을 거의 모든 정파가 우습게 여기는 한국 정치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언론 중에서도 경향신문 정도가 이러한 관점으로 이석기 의원과 ‘RO’ 측을 비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경시의 풍조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새누리당 측에 유리할 것이다. 진보담론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치 역시 보수의 것이라고 비판할 것만 아니라 그것을 도구로라도 충분히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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