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능환 전 대법관 겸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지난 27일 로펌행을 결정했다. 대형 로펌 '율촌'이다. 법조계를 떠난 뒤, '편의점 아저씨'의 삶을 택하며 서민 생활을 한 지 5개월 만이다. 사실상 전관예우인 셈이다.
그가 로펌행을 선택한 이후 법조 기자들에게 보냈다는 <맹자>의 한 구절,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씁쓸하다는 반응이 많다. 진짜 '무항산'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 앞에서 고위 공직자가 꺼낼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월 '편의점 아저씨'가 됐다는 김능환 전 위원장의 소식은 큰 화제였다. 방송사들에게 지나칠 수 없는 기삿거리였다. 고위 공직자가 퇴직 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소하게 사는 모습은 그 자체로 '미담'이었다. SBS <8뉴스>는 <채소 파는 대법관 사모님>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소식을 전했다.
SBS는 "중앙선관위원장 퇴임을 앞둔 김 위원장도 여전히 대형 로펌에 가거나 변호사 사무실을 낼 계획이 없다"며 "33년간 공직 생활에 재산이라곤 아파트 한 채뿐이지만, 물질적인 욕심보다는 올바른 처신을 고민하는 중앙선관위원장"이라고 말했다.
또 "그런 남편을 묵묵히 인정하며 노년의 평범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부인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 고위 공직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편의점을 떠난 현재, 듣기엔 다소 민망한 멘트들이다.
KBS <뉴스9>도 지난 3월 <편의점 아저씨로>라는 제목으로 김능환 전 위원장의 소식을 전했다. KBS <뉴스9>는 "김능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퇴임후 소탈한 편의점 아저씨가 됐다"며 "억대 연봉의 로펌으로 향하는 고위공직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위공직 출신들의 끊이지 않는 전관예우 논란, 소시민으로 돌아간 김 전 위원장의 인생 2막은 그래서 더 감동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8일 KBS <뉴스광장>에서는 그를 '현대판 딸깍발이'라고 칭하며 추켜세웠다. 이 역시 다소 민망하다.
KBS의 말처럼 고위 공직 출신의 전관예우는 법조계의 '악습'으로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다. 판·검사 전관 변호사들은 대형 로펌을 위해 로비스트가 되곤 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가 현직 판·검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탈세 등 법망을 피해 불법을 저지르는 행태도 만연하다고 한다. 김 전 위원장의 로펌행도 이러한 우려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상파 3사는 그의 로펌행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봤을까? MBC는 29일 김 전 위원장과 인터뷰를 한 꼭지로 보도했다. KBS는 관련 소식을 단신으로 전할 뿐이었다. SBS는 현재(30일)까지 인터넷 뉴스로만 보도했다.
MBC <뉴스데스크> <"서민생활 해봤더니…">라는 제목의 리포트에서 김 전 위원장은 "서민생활이 어렵다"며 "해보고 싶어도 일정한 소득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꾸준하게 뭘 추구하고 싶어도 (쉽지 않다)"고 밝혔다. '5개월 서민 코스프레'로 인해 소득의 불안정이 커졌던 것일까? 서민의 삶에서는 "꾸준히 추구"할 수 없는 무언가가 궁금하기도 하다. MBC는 로펌행이 어쩔 수 없다는 김 전 위원장 발언에만 주목했다.
소시민으로 살고자 했던 김 전 위원장의 진의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실제 그가 33년 동안 공직 생활을 통해 모은 돈이 9억 원 정도로 알려졌다. 당시 재직 대법관 중 꼴지 수준이었다. '3권 분립'을 들어 박 대통령의 러브콜도 마다했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가 만연한 한국 현실에 비춰보면 김 전 위원장은 '청백리'라고 불릴 만하다.
그런 그도 대형 로펌행을 선택해야 할 만큼 법조계의 관행은 뿌리 깊지만, 이를 감시해야 할 방송사들은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