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명한 언론학자 토드 기틀린의 책 <무한 미디어>에는 저자가 방송과 인터뷰를 한 뒤 큰 곤욕을 치른 에피소드가 나온다. 방송 문법에 누구보다 빠삭하고 비판적인 그였지만, 이라크 침략 전쟁과 관련해 밝힌 ‘반전’ 입장이 ‘전쟁 불가피론’으로 오해사기 딱 좋게 보도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나는 방송과 더러 인터뷰할 때면 인터뷰어에게 꼭 이렇게 묻는다. “(내 얘기를) 몇 초나 쓸 겁니까?” 시계 초침을 보며 말을 가다듬은 다음, 할 말만 주어진 시간 안에 딱 하고 끝내버린다.

방송의 문법은 영상과 내레이션의 상호작용에 관한 경험적 규범이다. 방송의 메시지란 이들 두 핵심요소가 수용자의 인지감각을 거쳐 빚어낸 ‘이미지’다. 방송가 은어 가운데 ‘간지’라는 게 있다. 우리말의 ‘느낌’ ‘분위기’ 정도에 해당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뒤 생긴 외계어 ‘노간지’(멋있다)도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방송가에서 간지라는 표현을 유독 자주 쓰는 것도 방송의 이미지 의존성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간지는 편집 과정에서 집중적인 조탁을 거친다.

방송 텍스트의 기본 단위는 숏(shot)이다. 거칠게 말하면 편집은 숏을 이어붙여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숏을 배열하는 순서는 취재한 순서와 아무 상관이 없다. 숏의 길이도 애초 취재한 텍스트의 길이보다 얼마든지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자르거나, 아예 버릴 수도 있다. (‘무한도전’이나 ‘개콘’ 출연자가 “편집됐다”라고 말하는 건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시청자는 이처럼 뒤죽박죽인 편집본을 보고도 그것을 완결적인 서사구조로 받아들인다. 간지를 잘 살린 것일수록 더 그렇다. 방송인들에게 간지는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진다.

▲ 조선일보 6월26일자 1면.
편집은 방송의 물리적 제약(꼭지당 러닝타임)과의 지난한 힘겨루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뉴스의 꼭지당 러닝타임은 평균 1분30초다. 그 촌음 속에 인터뷰 2, 3개를 밀어넣으려면 인터뷰이의 말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방송 뉴스 인터뷰를 보면 말이 뚝뚝 끊긴다. 물론 신문도 지면이라는 물리적 제약에 갇힌다. 그러나 신문은 인터뷰이의 말이 기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맥락을 살려 메타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방송은 자르고 이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기틀린이 방송 인터뷰 뒤 후회막급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의도했든 안 했든, 기자는 간지를 잘못 살렸다.

MBC <PD수첩>이 왜곡 논란에 휩싸여 있다. 청와대·한나라당은 ‘일벌백계’를 천명한다. 검찰은 특별수사팀까지 꾸려 특별한 수사를 벼른다. 특별한 수사를 통한 일벌백계는 <PD수첩>이 ‘고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는 전제에 의해 뒷받침된다. 요는 ‘그런 식으로 보도하면 대한민국이 무법천지가 된다는 ‘정을 알면서도’(‘될 줄 알면서도’의 검사스런 표현) 악의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중동은 <PD수첩>의 이런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대대적으로 지면에 전시하고 있다.

조중동이 정아무개라는 번역가의 게시판 글과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PD수첩>의 왜곡 사례로 적시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는 △‘주저앉은 소’를 ‘광우병 의심 소’로 번역한 것 △아레사 빈슨의 어머니가 딸의 사인에 대해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라고 표현한 것을 인간광우병(vCJD)으로 자막 표기한 것 △번역가의 문제 제기를 무시한 것 등이다. 다른 왜곡 ‘의심’ 사례가 더 제시됐지만, 일벌백계를 떠올리기에는 내 상상력이 너무 빈곤한 탓에 언급하지 않겠다. <PD수첩>이 얼마나 어떻게 잘못했는지 조·중·동의 안경을 벗기고 내 안경을 통해 다시 따져 보겠다.

조중동은 얼핏 엄격한 저널리즘 준칙과 논리학의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도 ‘주저앉은 소’를 ‘광우병 위험 소’라고 표현한 것은 “사물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써야 한다”는 ‘직접성’의 원칙, “형식상 주관성이 들어가지 않은 표현을 써야 한다”는 ‘객관성’의 원칙, “내용상 치우침이 없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공정성’의 원칙을 어겼을 수 있다. 모든 주저앉은 소가 광우병 소가 아닌 데다, 정량적으로도 주저앉은 소 가운데 상당수가 광우병에 걸린 것도 아니기에, ‘주저앉은 소=광우병 의심 소’는 논리학 교과서의 ‘부분과 전체의 오류’에 해당할 수 있다. 난 개인적으로 번역가의 ‘쓰러지는 소’에 한 표 던진다. 아무래도 <PD수첩>은 이 문제에 있어서 간지를 너무 살렸다.

▲ 중앙일보 6월26일자 1면.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이 정도의 ‘초치기’가 일벌백계 대상인가? 그렇다면 난 두려운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은 ‘안영초’다. 나도 했으니, 이제 조중동도 하기를 기대한다. 정론을 신념으로 삼는 많은 ‘양심적 언론인’을 ‘좌파 언론인’이라고 (지속적으로) 오역해 표현하는 것,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을 ‘청와대 주요 관계자’로 (반복적으로) 과장해 표현하는 것, 아니 무엇보다 ‘극소수가 아고라 여론 장악’이라고 보도하면서 그 압도적 1위가 ‘MB 알바’라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감춰 왜곡한 것에 대해 자백하기를 기대한다. 나와 함께 석고대죄하며 일벌백계를 기다리기를.

다음은 빈슨의 어머니가 CJD라고 표현한 것을 vCJD로 자막 표기한 것. 빈슨의 어머니는 CJD와 vCJD를 혼돈해서 쓴다. (그녀가 내국인이었으면 일벌백계 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딸이 vCJD로 숨졌을 거라고 강하게 의심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CJD가 ‘사실’인가, 아니면 vCJD가 ‘사실’인가? 훈장님이 ‘바담풍’ 할 때 초립동이는 ‘바담풍’ 할 것인가, ‘바람풍’ 할 것인가? 내가 아는 한 ‘바람풍’ 하는 것이 공정성의 원칙에 맞다. 아니, 방송 출연자가 욕을 했을 때 ‘삐리리’로 편집하지 않으면 방송통신위원회의 징계를 받는다. 조·중·동은 정녕 ‘대통령 직속’ 방송통신위원회(위원장 최시중)에게 반기를 들 건가?

끝으로, 번역가의 문제 제기를 무시한(무시했다고 주장하는) 것. 중앙일보가 말풍선 비슷한 도표까지 그려가며 거품 물었던 바로 그 대목이다.

PD수첩 : 정씨가 ‘다우너 소를 광우병과 연결하는 건 왜곡’이라는 문제제기를 제작진에게 한 적이 없다.
정씨 : 보조작가에게 분명히 ‘PD에게 내 지적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번역과정 중 내내 제작진을 만난 적이 없다.

제작진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제작진이 문제 제기를 무시했다니? 보조작가가 정씨 말을 PD에게 옮기지 않은 ‘왜곡’을 범했다는 것인가? 중앙일보는 그 보조작가를 취재해봤나? 이거야 토드 기틀린이 당한 것보다 더 심한 뒤통수 아닌가? 중앙일보는 도표의 간지를 ‘고의적’으로 악용한 것 아닌가?

신문쟁이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은어 가운데 ‘야마’라는 표현이 있다. 방송의 ‘간지’와 마찬가지로 원산지는 일본이다. 우리말로는 ‘주제’ 정도에 해당하는데, ‘주제’는 ‘야마’의 말맛과 행간을 다 살리기에 역부족이다. ‘야마’에는 “이것이 왜, 어떤 흐름과 맥락에서 기사가 될 수 있지?”라는 저널리즘적 물음과 답이 내장돼 있다. 모든 기사에는 당연히 야마가 있다(또는 있어야 한다)고 신문쟁이들은 믿는다. 방송쟁이가 간지 잘 못 살리면 위험하듯이, 신문쟁이가 야마 잘못 잡으면 위험하다. 야마를 위해 부적절하게 ‘사실’을 선택하고 재구성해 진실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6월27일자 12면.
보셨다시피, 조중동의 <PD수첩> 때리기는 잘못 잡은 야마 범벅이다. 아니, 야마와 간지를 뒤섞은 초무침이다. 26일치 중앙일보 <4월29일 방영된 PD수첩 56분 다시 보니> 기사의 보조제목은 “스산한 느낌의 배경음악 겹쳐…‘보도’를 ‘드라마’처럼 만들어”이다. 어떤가? 난 이 제목이 그처럼 드라마틱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레퀴엠의 환청이 들릴 지경이다.

그러나 50일이 넘는 촛불집회를 오로지 <PD수첩>의 고의적 왜곡의 결과로 몰아가는 것만큼 단순무식한 악의적 왜곡은 없어 보인다. <PD수첩>이 농수산식품부의 명예를 훼손했는지는 헷갈리는데, 조중동은 촛불 민심 전체를, 거리에서 집에서 이명박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쇠고기 협상과 추가협상을 규탄하거나 개탄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명예를 확실히 훼손했다. 그리고 삼엄한 저널리즘의 준칙과 논리학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 정작 일삼아 사칭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거래하는 그들이 “PD수첩이 취재원을 협박했다”며, 저널리즘의 순결성을 매명했던 3년 전 황우석 사태 때처럼.

<PD수첩>의 왜곡 위험성을 지적했던 정아무개 번역가는 자신의 이름과 글을 옮긴 조·중·동의 보도를 보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 황우석 사태 때 황 박사와 조·중·동 및 YTN의 보도 행태를 꼬집었던 글을 연결합니다. 저널리즘 윤리를 참칭하는 묘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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