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2013년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뉴스1
박근혜 대통령은 스승의 날인 15일 개최한 언론사 정치부장단 초청 만찬에서 "전문성을 보고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인물이 한번 맡으면 어떻겠느냐 해서 그런대로 절차를 밟았는데도 엉뚱한 결과가 나오고, 그런 때는 참 저 자신도 굉장히 실망스럽고 '그런 인물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토로했다.
박대통령은 "앞으로 더 철저하게 노력하는 길, 더 시스템을 강화하는 길을 찾고, 지금 있는 자료도 차곡차곡 쌓으면서 상시적으로 (인사검증)하는 체제로 바꿔나가고 있다"면서 인사검증 논란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윤 전 대변인이 사실 그렇게 성추행에 연루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또한 박대통령은 논란이 됐던 '윤창중 사태'를 보고받은 시점에 대해 "이때 받았다, 저때 받았다 하는데 정확한 것은 로스앤젤레스를 떠나는 날(현지시간 9일) 아침 9시 조금 넘어 9시 반 사이"라고 밝혔다.
▲ 16일자 한겨레 5면 기사.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발언을 소개했다.
박 대통령 만찬 발언은 대통령의 책임문제를 쏙 빼놓았을 뿐더러 ‘윤창중 사건’의 심각성을 특정 영역에 국한시키는 것이란 점에서 커다란 문제가 있다. 정권 수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윤창중 사건’에서 문제삼을 수 있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다음의 다섯 가지 정도다.
1) 먼저 성추행 진실공방을 떠나서라도 해당 시간에 청와대 대변인이 인턴과 술을 마시고 또 밤새 술을 마셨다는 사건 정황과 청와대 민정수사실 수사결과를 전면 부정한 향후 대응에서 드러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인격과 품성에 대한 경악의 차원일 것이다.
2) 다음으로 이러한 윤창중 전 대변인이 걸러지지 않은 인사검증 시스템의 문제다.
3) 청와대 대변인에 대한 인사결정권자가 대통령이라는 측면에서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문제도 있다. 특히 윤창중 전 대변인의 경우 인수위 대변인 때부터 논란이 많았고 이에 대해 박대통령이 “내가 알아서 할께요”라며 비호하는 등 ‘불통인사 1호’라는 논란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박대통령은 "성추행에 연루될 줄 누가 알았나"고 하지만 내용이 성추행일 줄 몰랐을 뿐 윤 전 대변인이 '사고'를 칠거라 생각한 이들은 부지기수였단 사실을 알아야 한다.
4) 사건 발생 후 청와대 대응의 문제다. 대통령에 대한 보고가 지나치게 늦었고 비서관들이 후속조치를 취한 후 보고를 하는 형식이 되었다. 윤창중 전 대변인을 귀국시키는 후속조치가 적절하지도 않았다는 평가다. 이제 와서 윤창중 전 대변인에게 미국 가서 조사를 받으라고 요구할 거면 처음부터 그를 대피시키기보다는 미국 경찰의 조사를 받게 했어야 했다. 그를 귀국시킨 조치는 그가 기자회견 없이 조용히 근신할 것을 기대하여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려 했던 근시안적인 ‘기술적 조치’로 판단될 수 있다.
5) 사건의 파장이 커진 후 사과를 표하는 과정에서도 청와대는 무능과 혼선을 드러냈다. 이남기 전 홍보수석, 허태열 비서실장, 박근혜 대통령이 차례로 3차례에 걸쳐 사과하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남기 전 홍보수석은 박 대통령에게 사과하는, 박대통령은 사과를 국민에게 직접 하지 않고 회의를 주재하면서 하는 등의 문제를 보였다.
사실은 뒤로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이 사안들을 동등하다 치더라도 박 대통령은 단지 앞의 두 개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박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후보 시절부터 화제였고 모든 문제에 대해 논평하면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은 쏙 빼고 말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만찬에서도 박 대통령은 3)의 논점을 생략하면서 그 자신의 육체를 이탈하여 영혼만 공중부양하여 뭇 인간과 사물을 내려다보는 유체이탈 화법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 16일자 한겨레 5면 조혜정 기자의 기자수첩. 박대통령의 인식에는 자신의 잘못이란 측면이 빠져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발언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박 대통령이 4)와 5)의 논점은 차마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는 박 대통령의 책임을 회피하는 문제보다도 국정운영에 더 큰 장애가 되며 장기적으로 볼 때 정권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지 현재의 청와대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넘어서, 물론 그 문제만으로도 사태는 심각한 것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물위에 동동 뜬 한 방울의 기름처럼 국가 기관과 관료들을 장악하지 못하고 청와대 집무실 안에 홀로 고립되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흔히 ‘레임덕’이라 부르지만 정권 초의 측근들이 박 대통령을 업신여겨 이리 행동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문제는 반대로, 측근들이 박 대통령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사실을 늦게 보고하고 문제가 터지면 면피용 사과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거나 오히려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건이 터졌을 때 측근들이 바로 보고하지 않고 ‘알아서’ 대응책을 마련해 오는 것에 만족하고, 본인은 나중에 그게 문제가 되면 “적절하지 못했는데, 나와 상관없다”고 품평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한국인들은 원래 대통령을 군주처럼 생각하는 데다, 박 대통령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미지가 있으니 그런 ‘전략’이 마냥 실패할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처럼 수구언론이 물어뜯지도 않으니 측근들의 실수는 유권자들에게 ‘박근혜의 실수’가 아닌 ‘측근 개인의 실수’ 정도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유리한 민심과 언론환경에 자만하여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면 ‘가랑비에 옷 젖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내외적으로 경제민주화 문제나 북핵위기 등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할 사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이러한 ‘측근 위임형 통치’를 지속할 경우 박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어진다는 데에 있다.
만일 상황이 그런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박대통령은 퇴임할 때 ‘그저 아버지와의 추억을 곱씹으려고 청와대에 들어갔느냐’는 비아냥거림이나 받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통나무 왕’은 개구리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 잡아먹는 황새와 뱀들을 방치한 무능한 대통령이 될 뿐이다. 정말로 추억을 곱씹을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대한민국을 통치하거나 경영하려고 그 자리에 올라섰다면, ‘대통령이 무서워 보고하지 않는 무리들’과의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영국 왕실처럼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가 미덕인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 박근혜 대통령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존경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통치한다면 차라리 엘리자베스 2세를 존경한다고 말하는게 솔직한 일일 것이다. 지난 4월 17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부군인 필립 에든버러 공과 함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장례미사가 거행되는 세인트폴 성당 안으로 입장하고 있다. ⓒAFP=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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