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저녁식사는 뭘 먹을까 고민하던 일요일 밤이었다. 벌레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으면서 집 안에서 산들바람을 즐길 수 있는 짧은 시기이므로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저녁의 봄바람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이제 꽃을 전부 떨구어 버린 길 가의 나무가 야속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졸고 있을 무렵 스마트폰에 속보 알림이 떴다.

▲ 아이폰 알림센터에 뜬 YTN 뉴스 어플리케이션의 속보 알림.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시국이 그렇다지만 일주일의 반을 윤창중 스캔들로 괴롭힘 당했는데, ‘엉덩이’, ‘알몸’ 이런 단어가 품위 없는 맥락으로 쓰인 것을, 이렇게 상쾌한 저녁에, 꼭 ‘속보’로 보아야 하는가? 인생에 회의가 느껴졌다.

일단 스마트폰을 침대에 집어던지고 (고가의 물건이므로 바닥에 던질 수는 없었다) 컴퓨터를 이용해 관련 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윤창중 전 대변인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증언한 내용들이 기사화 돼 속보가 된 것이었다. 물론 이 내용을 누가 언론에 흘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야말로 근거 없는 짐작은 가능하다. 이게 영화 속 한 장면이라면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과 청와대를 붙들고 늘어진 윤창중 전 대변인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기 위해 권력기관의 일부가 작업(?)을 했다는 시나리오였을 거다. 이를 통해 ‘청와대가 사건의 은폐를 기도했느냐?’라는 프레임을 ‘윤창중은 변태’라는 것으로 일거에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짐작에 근거를 제공하듯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굉장한 제목을 뽑기 시작했다. 급기야 ‘노팬티’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팬티도 안 입고 문을 열어주는 변태’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SNS 공간 곳곳에 울려 퍼졌다. 개 중에는 “윤창중이 입었던 것은 샤넬 No.5”라는 꽤 재치 있는 패러디도 있었지만 대다수 이용자들은 그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을 따름이었다. 중년 남성의 팬티가 이토록 전국민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 때가 있었는가를 돌이켜 봤다. 그러다가 기분이 나빠졌다. 도대체 왜 중년 남성의 팬티에 대해 이렇게 심오한 고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아침이 되어 출근 준비를 하면서 옷을 챙겨 입다가 흠칫 놀랐다. 머릿속이 온통 ‘팬티’로 가득 차 버린 것이었다. 오늘 입을 팬티를 잘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지나치게 밝은 색의 팬티를 착용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윤창중 전 대변인이 착용했어야 할 팬티는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삼각? 트렁크?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분통이 터졌다.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침에 일간지 헤드라인을 흝어 보니 가관이다. 온통 엉덩이, 노팬티, 속옷……. 기가 막혔다. 우리 언론은 얼마든지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서 품위 있는 제목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최대한 부적절한 단어를 선택해서 최대한 품위 없는 제목을 뽑아내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물론 그 이유는 선정적인 방식을 통해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 엉덩이, 노팬티, 속옷으로 점령을 해버린 문명인들의 슬픈 자화상. 적어도 오늘(13일)자 주요 일간지 중에서 이러한 선정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신문은 조선일보가 유일했다.

물론 윤창중 전 대변인이 구체적으로 성추행을 어떻게 저질렀는지 여부는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언론은 윤창중 전 대변인의 행위가 성범죄에 해당할 만한 것인지 여부만 보도하면 된다. “윤창중 성범죄 저지른 것 확실, 민정수석실 조사에서 밝혀져” 정도의 제목이면 충분하다는 얘기다. 특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전국민이 알게 되는 것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입을 수도 있는 문제이니 만큼 언론이 신중한 태도로 보도할 필요가 있었던 문제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언론의 이러한 자극적 보도 행태는 결국 청와대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될 것이다. ‘이남기 대 윤창중의 진실게임’ 국면에서 윤창중 전 대변인을 파렴치한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청와대를 둘러싼 의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게임 구도가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권력기관과 언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중년 남성의 팬티에 점령당해버린 문명인들의 고귀한 정신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무릇 문명인이라면 더 심오한 문제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윤창중 전 대변인은 대체 왜 미국까지 건너가서 추태를 부렸는지, 이런 사건은 ‘예외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물들어있는 가부장-남성 중심적 문화의 일반적 반영인 것인지, 또는 청와대의 대응은 적절했는지,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입장을 표명하는 게 옳은지, 이런 문제를 고민하면서 인간 문명은 성숙해가는 것이다. 문명인들이 마치 버튼에 눌리면 일회적인 화를 내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기계처럼 행동하는 것을 강요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언론들은 이런 측면에서 반성을 좀 해야 한다. 정념으로 인한 지성의 혼란은 꽃과 봄바람에 의한 것이면 충분하다. 바야흐로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는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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