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 대한 서방의 경제 제재가 이라크 국민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던 지난 1996년, 당시 유엔 주재 미국 대사였던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는 미국 CBS의 시사 프로그램 <60분(60 Minutes)>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50만 명의 아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그런 희생이 가치가 있는 겁니까?” 올브라이트의 악명 높은 대답. “저는 그것이 매우 어려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는 그 희생이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미 국무장관이 된 올브라이트의 대변인이었던 제임스 루빈(James Rubin, 종군기자로 유명한 CNN의 여기자 크리스티 아만포의 남편이기도 하다.) 국무부 차관보는 이 책의 저자인 존 필저(John Pilger)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 제임스 루빈
“이라크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제가 거기서 환영받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무슨 권위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해 봤으니까요. …… 당신은 사담 후세인이 다른 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라크가 국제 체제의 기본 규칙을 어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구요?”
누가 대가를 치르는 거지요?”
“우리는 이라크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 당신은 현실세계이상세계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미 알려진 대로, 경제제재 이전의 이라크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복지에 도달한 국가였다. 인구의 92퍼센트가 안전한 물을 공급받았고, 93퍼센트가 무상의료보험혜택을 입었으며, 95퍼센트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일본에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보다 이라크의 경제제재가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서방세계는 침묵했다. 미국의 한 하원의원은 “부시와 보좌관들은 자신들이 나중에 죽이려고 만들어놓은 괴물에게 재정 지원을 했고, 장비를 대 주었고, 원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그런 증거들을 감추려 하고 있다”고 했다. 대량살상무기라는 새빨간 거짓말과 독재자 후세인 숙청의 배후에는 미국을 비롯한 이른바 선진국의 안정적인 ‘무기 거래’와 ‘석유 확보’라는 꼼수가 자리한다. 경제제재는 대량학살임에 분명하지만, 이 끔찍한 서방의 범죄를 심판할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의 설립은 미국의 극력 반대 속에 아직도 머나먼 숙제로 남아 있다.

▲ 제국의 지배자들 책표지
저자는 말한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도덕적이고 그 결과가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씌어진 때로부터 벌써 5년이 흘러 후세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독립국가 이라크는 서방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렇다면 지금, 이라크 국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들은 과거보다 더 행복해졌을까? 매들린 올브라이트도, 제임스 루빈도, 힘 있는 어느 누가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주었는가?

존 필저는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을 누비며 서방세계의 비양심적인 학살 만행을 폭로하고 숨겨진 의제를 파헤쳐온 저명한 탐사저널리스트다. 인도네시아 공장 노동자들의 짐승 같은 근로조건을 파헤치기 위해 패션 바이어를 가장해 잠입취재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라크 경제제재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이라크의 마을과 병원을 직접 다니며 고통 받는 이라크 민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1장 <모범생(The Model Pupil)>에서는 인도네시아에 불어 닥친 세계화의 재앙과 그 서곡이 된 수하르토 집권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음험한 배후를 파헤쳤고, 제2장 <대가를 치르다(Paying the Price)>에서는 서방의 경제제재로 황폐화된 이라크 민중의 삶과 그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서방세계의 대량학살과 침묵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저자는 말한다. “이라크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을 수도 있다. 사담 후세인인가, 아니면 영국과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인가? 잔인한 독재자(후세인)는 두 번째 정답일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많은 전쟁의 숨은 의도가 너무나도 자명한 ‘석유 쟁탈전’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일깨워주는 3장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에서는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진짜 이유가 이른바 ‘파이프라인 외교’이며, 체첸에 대한 러시아의 만행과 티벳에 대한 중국의 모진 박해도 결국은 미국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려는 것처럼 국제적인 합의에 따른 이권 나눠먹기의 결과였음이 드러난다. 무려 한 세기 전에 급진적 저널리스트 존 리드(John Reed)는 바쿠회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바쿠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십니까? ‘석유’라고 합니다.” 한 세기를 아우르는 저 석유를 향한 욕망과 군국주의적 기획의 일관성은 놀랍다.

▲ 존 필저
존 필저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진실이 삭제되면, 신화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대중은 거대한 권력의 본질과 패턴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군사주의가 도덕적인 행위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영화 <플래툰(Platoon)>과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을 포함한 수많은 침략전쟁의 기록들은 미군 병사들의 인간적이고 성스러운 죽음을 ‘고귀한 희생’으로 포장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세계화의 전도사이자 미국 대외정책의 수호자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이 단서를 준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각각의 글을 한데 아우르는 주제의식은 ‘제국주의의 귀환’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의 부제가 ‘제국주의와 세계화가 낳은 참상과 진실에 대한 4편의 다큐멘터리’인 까닭이다. 존 필저는 진정 힘 있는 지배 계층을 향해서는 냉혹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댔지만, 힘없고 핍박받는 민중들에게서는 늘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네 편은 모두 TV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것을 활자로 옮긴 것인데, 자신이 속한 서방세계의 지배계층과 주류 언론에게 환영받을 수 없었던 필저의 보도들은 같은 이유로 국내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에게 ‘신관념주의 좌파’라는 딱지가 붙었던 사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단편적인 글 몇 편을 빼면 이 책이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된 필저의 유일한 저서라는 사실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존 필저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한 마디로 ‘침묵을 깨라’는 것이다. 그 침묵을 깨기 위해 필저는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 더미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그레그 팰러스트(Greg Palast)가 그랬던 것처럼 쓰레기 더미를 샅샅이 파헤친다. 그래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존 필저의 책은 종종 암흑의 시대에 등대 같은 존재였다.”고 했고, 마사 겔혼(Martha Gellhorn)은 “존 필저를 진정으로 위대한 저널리스트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의 양심과 용기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어진 것에 너무 많이 길들여진 ‘주류’ 언론인들의 잠자는 양심을 깨우는 그의 목소리는 언론이 갈수록 기업을 닮아가는 작금의 현실을 비추는 등불이자 날카로운 채찍질이다. 내가 이 책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와 더불어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주저 없이 올려놓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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