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의 절반이 넘는 3년 동안을 대학신문사 기자로 지내면서 학보사 편집실에서 먹고 부대끼는 일이 많았었다. 문학적 사상의 자유로움과 80년대 시대적 혼란이 혼재한 캠퍼스는 낭만을 추구하는 것이 죄악시 되었다.

'민주화'가 하나의 신앙이었던 지난 날들

어려서부터 질 좋은 오디오시스템 갖는 게 소원이었던 나는 태광 에로이카 판매점 앞에 서서 보급용 오디오세트를 보고 ‘저거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가 선배로부터 ‘부르조아 근성’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오디오셋트 하나 갖고 싶다는 희망과 부르조아 근성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절 민주화는 우리의 신앙이었다. 민주화를 저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보지도, 먹지도, 생각지도, 행동하지도 말아야 했다.

행동이 굼뜨고 생각이 유연한 나에게 J선배는 이렇게 조언했다. “의식을 갖고 비판적으로 봐, 비판적으로!” 신문사 안에서 원고지와 씨름하며 기사 쓰는 것으로 비판적 의식의 실천을 하고 있다고 믿을 즈음 정문 앞에서 전경들과 대치하며 정면 대항한 ‘투사’들에게는 늘상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원고료로 막걸리나 사~” 막걸리 몇 잔으로도 갚아지지 않을 빚은 지금도 계속 남아 있다.

어려서부터 “작은 것 하나도 고맙고 감사하게 여겨야한다”는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나에게는 웬만해서 고맙지 않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향은 나에게 아늑함과 평온함을 제공해주었다. 몇 개월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방 일간지 기자로 일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고향과 고향사람들에 대해 매사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 지난 10일 저녁 세종로 네거리에서부터 시청 앞 태평로, 남대문 넘어까지 50만 시민이 함께 촛불을 들었다. ⓒ서정은
'희망'으로 써나간 지방 일간지 기자시절

내 고장은 산업발전이 더디고 지역이 낙후되어 어떤 자료를 갖다 대도 “전국 꼴찌, 낙후, 추락”과 같은 부정적 용어들만 표제로 뛰쳐나왔다. 열악한 환경, 빈약한 자본, 없는 살림에 비판적 시각을 갖다 대어본들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방 신문사 기자로 평생을 보내온 대 선배님들은 말했다. “낙후, 소외, 30년간 써먹은 말이야. 따뜻한 시각으로 용기를 줘라” 비판적 시각의 전환을 시도했다.

평균치와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플러스 요인이 발견되면 ‘다소 상승’과 같은 언어의 변화도 추구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 보도를 외면한 것은 결코 아니다.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무딘 펜으로나마 ‘희망’이라는 이름을 긁적이고 있을 때 날카로운 시각으로 기자적 본능을 발휘해 사회의 부정부패를 파헤친 민완기자들을 존경한다.

원음방송에 PD로 입사해서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나에겐 특히 다가왔다. 따뜻한 감성으로 맑고 밝고 훈훈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비판적이고 날카롭고 예리한 것’이 내겐 없지만 내가 가진 느리고 무딘 그 무엇으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신념 또한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달팽이처럼 느리고 더딘 내 속도로 살아가는 동안 번뜩이는 시의적절한 아이템과 용기있는 취재로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하는 시사 고발프로그램의 PD들을 존경한다.

전국에 '촛불'로 쏠려있는 지금, 지역종교방송은 무얼 해야 하나

촛불문화제가 계속되는 동안 지역방송, 종교방송, FM방송의 특성에 충실한다 하면서도 혹시 청취자에게 빚진 것은 없는지 초조하게 돌아보았다. 모든 매스컴이,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촛불문화제에 쏠려있는 동안 우리의 말이, 우리의 음악이, 우리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는가, 국민의 정서에 부응하고 있는가, 이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들로 괴롭다.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청취자의 소감, 참여 못해서 미안해하는 청취자의 반응, 경제현장의 첨병인 중장비 기사들의 하소연, 수입이 줄어 걱정이라는 자영업자, 운행을 중단해야겠다는 개인택시기사, 살맛이 안 난다는 시내버스기사……. 청취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보내오는 짧은 사연과 더불어 그나마 이렇게라도 마음 풀어놓을 곳 있어 다행이라고 이렇게 스스로 위로삼아도 되는 것인지 더욱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오늘도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방송을 마감할 즈음 홍작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 장금이 떡집 오늘 안온다 했더니 이제 들어 왔네요. 장사 잘되는갑따~. 신청곡은 채환의 파이팅이예요” 장금이 떡집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애청자는 줄곧 방송 시작하자마자 문자를 보내오는데 오늘따라 문자가 없어서 궁금하던 차 방송 마칠 즈음 안부와 함께 신청곡을 보내온 것이다. 아침에 주문이 밀려 바빴다가 이제 좀 한숨 돌리는 모양이라는 작가의 기분좋은 해석이 ‘꿈보다 해몽’처럼 즐겁다.

그래, 다들 힘들고 죽겠다 하는데, 장금이 떡집이라도 장사 잘되면 좋지, 느즈막히 도착한 애청자의 신청곡이 지금껏 쌓아놓은 고민을 날려준다. 지난주에는 떡 재료로 쓴다며 ‘오디’따러 갔다가 엊그제는 비오는 날 밤새워 촛불문화제에도 참여하고, 오늘 아침 일찍 떡 주문을 마감한 후 차 한잔 마시며 음악을 신청했을 장금이 떡집 아줌마, 그 분이 참으로 멋있다. 그러면서 겹쳐지는 또 한 생각.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서민들은 너무나 자기 삶에 충실하고, 이렇게 성실하고 착한 국민 덕에 이 나라가 지탱이 되는 거다.

그래, 오늘도 힘내서 가보는 거야. 채환의 파이팅을 마지막 곡으로 오늘 하루 “파이팅”을 외쳐본다. 이렇게 오늘도 삶은 계속되고 있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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