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언론에 할 말이 많았던 작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는 자신의 회고록 <나라 없는 사람 A Man Without a Country>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매체인 신문과 TV는 오늘날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부실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비겁하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방송국 안에서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납득하기 힘든 일들과 도리 없이 날마다 펼쳐보는 일부 신문의 속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접할 때면, 보네거트의 말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언제부터인가 절박한 심정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 '신문 읽기의 혁명' 책표지
내가 기억하는 한, 신문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그 방법까지 비교적 체계적으로 알려준 것은 바로 손석춘의 책 <신문 읽기의 혁명>이 처음이었다. 지난 1997에 초판이 나온 이후 명실상부 언론 입문서로는 고전(古典)이 된 이 책은 뒤에 나온 제정임의 <경제뉴스의 두 얼굴>과 박경만의 <조작의 폭력> 등 현장 기자들이 직접 쓴 의미 있는 저작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신문이 민주주의의 한 중요한 부분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며, 종이신문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지금도 이 전제는 분명 유효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한동안 시들했던 ‘신문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킨 최근의 사건은 다름 아닌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과 그로 인한 촛불집회였다.

손석춘은 말한다. 문제는 신문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에 있지 않다고. 신문을 어떻게 읽느냐가 문제라고. 왜? 나쁜 신문의 그릇된 기사는 독자의 건전한 상식과 양심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신문 읽기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촉구하는 이유는 사실 이렇듯 너무나도 간단하다.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읽는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가 선택한 신문의 기사 내용과 논조를 그대로 믿어버리고 싶어 한다. 왜? 특정한 신문을 선택한 바로 그 이유가 자신이 그 신문에 보내는 신뢰의 결과이므로. 따라서 일단 선택한 뒤에는 스스로 어떠한 의심이나 비판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 다음은? “신문이 제시하는 사고의 틀, 삶의 테두리 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고착된 우리 여론시장의 보수성이 예서 기인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어쩌다 식구들과 마주 앉아 저녁식사를 하게 되면 시국 얘기 한두 마디 안 나올 수가 없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높디높은 벽을 실감하고는 한다. 대운하는 꼭 해야 한다! 왜요? 독일을 봐라. 운하 만들어서 경제가 크게 발전하지 않았느냐. 좁은 땅덩어리에 삼면이 바다인데도? 우리나라 최고 학벌 서울대 교수들까지 저렇게 반대하는 데도? 환경재앙이 온대도? 해야 한다. 그런데 정연주 사장은 왜 안 나가는 거냐? 왜요? 왜 나가야 하는 건데요? 전 정권의 코드인사 아니냐? 정연주 사장 물러나면 이 정권이 어떤 일을 벌일지 아세요? 그건 너희 내부 문제니까 너희들이 더 잘 알겠지. 그런데도 나가야 한다는 말씀? 나가야지. 언제나 평행선을 긋는 대화. 그리고 내 가족조차 논리적으로 설득해낼 수 없는 이 무거운 현실의 원인은 매일 아침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 조선일보! 손석춘은 이렇게 설명한다.

▲ 저자 손석춘씨.
“한 신문만을 구독하며 그 신문의 보도대로 삶의 현실을 인식할 경우 그 신문의 편집방향에 독자들은 세뇌될 수밖에 없다. 이는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계속 떨어져 마침내 바위를 뚫는 이치와 같다.”

한겨레가 개혁 정부 10년 동안 수많은 독자를 잃었던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정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정파적 성격이 강한 우리 신문의 특성 때문인데, 정권이 바뀌자 기다렸다는 듯이 줄을 서는 보수신문들의 행태는 이보다 몇 백 걸음은 더 나아간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광우병의 위험성을 목청껏 소리쳐대다 정부가 바뀌자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동아일보의 행태는 ‘일관성’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정부 고위관료가 믿을만한 유일한 신문이라며 한껏 치켜세워준 동아일보의 이런 태도는 책에 소개된, 나폴레옹 시절의 프랑스 신문 <모니퇴르(Moniteur)>의 사례를 연상케 한다. 실각한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에서 탈출하자, 이 신문은 표제를 어떻게 썼을까.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만에 상륙’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혁명 과정에서 시민의 편을 들어 1등이 되었다는 이 신문은 이렇게 줄기차게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다 나폴레옹이 거짓말처럼 권력을 되찾자 이번엔 이렇게 말을 바꾼다.

‘황제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튀틀리 궁전에 듭시었다’

일제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변신’이 정말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우리 보수신문들의 행태와 어쩌면 이렇게도 똑같은가. 그러니 한국의 대표 ‘모니퇴르’들이 지금 수많은 독자들의 호된 비판을 넘어 절독 불매의 압력에 직면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지난 1991년 동아 사태 때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김중배 전 편집국장은 떠나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과거에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은 정치권력이었지만 90년대 들어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은 언론자본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신문은 결코 독자를 능가할 수 없지만, 한 나라의 언론의 수준은 곧 그 나라 국민의 수준.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요는 신문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데 있다. 가로 39cm, 세로 54.5cm의 작은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거짓말 잔치와 사기극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금 신문 독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벼려야 한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문 편집 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손석춘의 말대로, 우리도 이제는 우리 겨레의 정신을 살찌워줄 진정한 민족지, 21세기를 담아내고 이끌어갈 세계적인 권위지 하나쯤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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