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뒷북을 쳐야 할까. 아무리 밤샘 취재를 하고 서둘러 속보를 올려도 현장을 생중계하는 수많은 BJ(방송자키·Broadcasting Jockey)들과 블로거들, 아고라에서 실시간으로 토론하고 문자를 주고 받는 '1인 미디어' 앞에 기성 언론은 무력하다. 2008년 봄,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촛불집회 현장에서는 적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72시간 연속 촛불집회가 벌어지고 있던 7일 밤, KBS 1TV <다큐멘터리 3일-촛불! 대한민국을 밝히다>에선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벌어진 72시간의 촛불집회 기록이 전파를 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전의 이야기다. 5월 29일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 고시가 발표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 KBS 1TV '다큐멘터리 3일-촛불! 대한민국을 밝히다'
예전 같으면 일주일 전의 집회현장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지상파를 타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겠지만, 네티즌들의 쉼없는 '생중계' 활약은 이 프로그램마저도 '뒷북'으로 만들어버린다.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빨리빨리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거리의 미디어'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설사 '뒷북'이라고 해도 '내용'이 알차다면 또다른 경쟁력을 확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수만명의 시민들이 왜 거리로 촛불을 들고 쏟아져 나왔을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72시간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미 쇠고기 수입 협상에서 국민 안전을 뒷전으로 내팽개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시작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민심'을 무시하는 정부의 오만한 태도가 분노의 불을 더 당기고 있다는 점,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시민들의 의지를 확인한 대목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다큐 3일'이 만난 시민들의 표정에서는 분노와 희망, 절망과 피로감이 모두 하나로 뒤섞여 있었다.

아이와 함께 나온 부모들은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거리에 섰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접을 수 없는 이유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100일만에 나라가 30년 뒤로 추락한 것 같다"는 어른들에게 "어린 나이에 이런 것을 경험해봐서 약간 유익하진 않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정치가 중에서 잘못 뽑으면 온 국민이 분노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초등학생의 이야기는 '투표를 잘못했다'고 후회하던 어른들을 순간 서늘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이명박 대통령만 '민심'을 모른다. 아니 모른 척 한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매일 밤 청와대를 향해 항의의 뜻을 외치고 있는데도 "재협상은 없다"고 못을 박거나 "촛불집회는 주사파가 배후"라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로 국민들을 더욱 더 분노하게 만든다.

▲ KBS 1TV '다큐멘터리 3일-촛불! 대한민국을 밝히다'
분노하고 화가 난 시민들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 분들의 힘들이 오늘의 힘을 만들어낸다"며 "내가 이 자리를 떠나면 다른 분들이 채울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한 시민은 '축제'의 힘을 강조한다. "시위가 아닌 축제, 소풍이 됐다는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더 유념을 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심각하게 싸우는 게 아니고 놀면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절대 이길 수가 없다고!

실제로 '현장'은 즐겁다. 뜨거운 함성, 신나는 구호, 재기발랄한 손팻말, 축제 분위기는 달라진 시위 문화를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거리에 나선 시민들이 들려주는 저마다의 사연과 분노의 이유가 '3일'의 시간을 통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것이 '다큐 3일'이 갖는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그러나 청와대 진입을 가로막고 선 견고한 경찰버스, 쏟아지는 소화기와 물대포,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방패와 곤봉 뒤에 숨어 '민심'을 외면하는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이를 왜곡하거나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기성 언론을 향한 시민들의 분노와 절망감이 얼마나 깊숙한 것인지를 '다큐 3일'은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물론 이 거대한 흐름의 세세한 결을 3일의 시간, 그리고 50분의 방송 분량으로 다 소화해내기를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 현재진행형인데다가 앞으로 더 진화해 나갈 시민들의 에너지와 그로 인해 오늘도 꿈틀대는 역사의 흐름을 단지 며칠 동안의 카메라로 모두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부터가 과욕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은 촛불집회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수많은 기자와 PD들에게 던져진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미 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 실시, 미친 정책 모두 철회, 이명박 심판'을 요구하며 20만명의 시민들이 모인 촛불집회는 8일에도 4일째 72시간 릴레이 국민대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7일 밤부터 8일 새벽 시민들이 청와대로 항의하러 가는 길에도 또다시 폭력진압과 강제연행이 반복됐다.

"우리도 피곤하다"고 시민들을 외친다. 아무리 즐거운 축제로 승화시킨다고 해도 가슴 속 분노와 울분, 극도의 피로감이 터질 듯 쌓여가고 있다. "모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대통령의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시민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촛불집회 현장으로 향하고 있지만 끝이 안보이는 싸움, 메아리 없는 외침에 지쳐가기는 마찬가지다.

▲ KBS 1TV '다큐멘터리 3일-촛불! 대한민국을 밝히다'
이명박 대통령은 7일 밤 KBS '다큐 3일'을 봤을까? 그랬다면 "KBS 정연주 사장을 빨리 내보내고 측근을 사장으로 앉혀 저런 짜증나는 프로그램 싹부터 잘라야 한다"고 노발대발 했을지도 모르겠다. 벌써 이 정부는 YTN에 이어 아리랑TV 사장까지 대선 캠프에서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을 낙하산으로 투하시키는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이제 남은 것은 KBS와 MBC다. 이 정부가 언론을 장악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일방통행식 '소통'을 시도한다면 5년 내내 시민들은 거리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한다. 끔찍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 특히 공영방송 KBS가 해야 할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 명확해진다. '개인 미디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정부'와 '권력'을 상대로 보다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국민들의 거리 시위와 외침을 논리적으로 근거있게 정확히 대변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성 언론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장 해야할 몫이다.

미 쇠고기 수입 문제 뿐만 아니라 물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대운하 등도 우리 국민의 일상 생활과 삶의 터전을 파괴시키는 '그들만의 정책'이다. 이러한 정부 정책의 실상을 알리고 잘못된 점은 비판하는 등 공론장의 기능을 충실히 해낼 때 시민들은 공영방송의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체감할 것이다. "수신료가 아깝지 않다" "KBS 보면 속 시원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그래서 촛불집회에서 KBS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질 때 '공영방송 KBS'의 진정한 미래는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큐 3일'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신발끈을 묶고 다음 역을 향해 또다시 출발해야 한다. 종착역은 아직 멀었지만 달리다보면 속도는 붙기 마련이고 많은 시민들도 그 여정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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