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폭우만 쏟아졌다 하면 출근을 하지 못해 직장에서 매번 ‘잘리는’ 것에 도가 튼 여자가 있다. 비만 쏟아지면, 마치 빗방울이 물이 아니라 강한 염산이기라도 한 듯 윤희(성유리 분)는 꼼짝달싹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빠진 윤희를 구하려다 윤희 대신 저 세상으로 간 ‘남동생의 기억’이 ‘비 오는 날’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비만 왔다 하면 남동생에 대한 트라우마로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못하는 윤희의 딱한 사연을 고용주로선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물에 빠진 윤희가 죽고 남동생이 살았어야 했던 걸까. 윤희의 아버지는 남동생이 죽은 그날 이후로 윤희를 두들겨 패기 바쁘다. 딸을 두들겨 팰 때마다 죽었어야 할 사람은 남동생이 아닌 윤희어야 했었다는 듯 “너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을 윤희에게 건네며 학대한다.

이런 아버지의 말이 진심어린 진리라도 되는 양, 윤희는 아버지의 ‘쓸모없는 것’이라는 탄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아버지에게 물리적인 폭력과 정신적인 학대를 모두 받는 게다.

윤희의 지갑을 빼앗은 불량학생 진호(이주승 분)는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혼자 모셔야 하는 ‘소년가장’이다. 어머니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사채를 끌어 쓴 통에 사채업자에게 쫓겨 사는 진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별했다는 아픔과 사채업자에게 받는 위협을 다른 사람에게 폭력으로 되갚는 캐릭터다. 욕을 입에 달고 살면서 후배를 구타하고 윤희의 돈을 빼앗는다는 건, 자신이 받은 폭력을 다른 사람에게 폭력으로 되갚는 폭력의 쳇바퀴를 보여준다.

이런 진호에게 윤희는 처음엔 당한다.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진호에게 지갑을 순순히 내어주지만, 그녀가 일하는 학교의 학생인 걸 알고는 자기 지갑을 돌려줄 걸 요구한다. 자기가 잃은 걸 되찾겠다는 요청이다. 진호 역시 본질이 나쁜 녀석이 아닌지라 빼앗은 돈과 지갑을 되돌려주고는,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패닉 상태에 빠진 윤희를 공중전화 부스로 데려가 비를 피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때부터 윤희는 죽은 남동생 대신 진호에게 감정이입하기 시작한다.

진호 역시 자신이 사채업자에게, 그리고 어머니를 떠난 나쁜 아버지를 대신하여 폭력으로 응징할 진짜 상대를 찾는다. 그는 다름 아닌 윤희의 아버지. 걸핏하면 북어 패듯 윤희를 두들겨 패는 윤희의 아버지를 향해 폭력을 날린다. 윤희 혹은 학교 후배와 같은 애먼 사람들에게 푸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쳇바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윤희를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구원으로서의 폭력이다.

윤희가 진호를 향한, 윤희를 향한 진호의 감정이 싹틀 때에야 비로소 소통이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진호에게 동생 같은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가 <누나>다. 성유리는 영화 <누나>를 통해 그간의 병풍과도 같은 존재감 없는 역할에서 벗어나 연기돌로 거듭났음을 보여준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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