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2013>의 고남순(이종석 분)은 특이한 캐릭터다. 주먹을 쓸 줄 알면서도, 싸움의 대가면서도 자기가 잘 싸운다는 사실을 숨기고 일진 오정호(곽정욱 분)에게 두들겨 맞는다. 싸울 줄 몰라 두들겨 맞는 게 아니라 자기가 옛날에 일진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오정호에게 맞아주는 게다.

그런데 고남순이 왕년에 잘 나가는 일진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오정호에게 맞아준다는 건 중국영화 <무협>, 혹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와 맥락을 같이 한다. 드라마 한 편이 중국 무협영화 혹은 서부영화와 궤를 같이 한다니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무협> 혹은 <용서받지 못한 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속세로 숨어 지내는 ‘은둔 고수’가 주인공인 영화들이다.

<무협>의 진시(견자단 분)는 어느 날 마을에 들이닥친 강도를 ‘소가 뒷걸음질하다가 쥐를 잡는 격’으로 제압한다. 만일 진시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두 강도를 결코 맨손으로 제압하는 내공은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시의 정체는 종이 기술자가 아닌, 악명 높은 72파의 실세였다.

마찬가지로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 분) 역시 왕년에는 ‘한 총 뽑는’ 무법자였다. 손에서 피비린내가 마를 날이 없던 머니를 구한 건 다름 아닌 아내와의 결혼. 아내와 결혼한 후 머니는 과거 무법자의 삶을 깨끗하게 청산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한다.

<무협>의 진시가 주먹을 쥐는 건,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머니가 다시금 총을 잡는 건 이들이 가장 아끼는 존재가 위협받을 때다. 진시는 아버지가 이끄는 72파의 위협으로부터 아위(탕웨이 분)를 보호하기 위해, 머니는 사랑하는 친구 네드 로건(모건 프리먼 분)이 죽은 것에 대한 복수로 주먹을 쥐거나 총을 잡는다.

진시와 머니와 마찬가지로 고남순이 주먹을 다시금 쥐게 된 건 오정호가 그의 절친이었던 박흥수(김우빈 분)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오정호가 박흥수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고남순은 자신이 일진이었다는 과거를 계속 숨긴 채 오정호의 셔틀 역할을 하거나 얻어맞으면서도 일진이라는 과거를 숨기고 살았을 테다.

무력을 아는 이가 무력을 숨기고 평범하게 산다는 건, 주먹 혹은 총이 선사하는 폭력의 쾌감이 평범함 속에 감춰진 일상의 행복보다 못하다는 걸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남순이나 진시, 혹은 윌리엄 머니가 제일 아끼는 존재가 폭력에 의해 깨어질 때 이들은 언제든지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폭력으로 회귀할 수 있음을 <학교 2013>과 <용서받지 못한 자>, <무협>은 보여주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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