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스크린과 공연계 가운데서 왕정 이야기를 다루는 두 작품, 그러니까 <로얄어페어>와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엔 하나의 공통점이 보인다. 배우자 아닌 다른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불륜’이 이 두 작품의 공통분모다. <로얄어페어>는 왕비가, <황태자 루돌프>는 왕세자가 바람을 피운다.

그렇다면 이 두 작품에서 주인공은 왜 바람을 피울까. 배우자와의 소통이 빵점에 가까워서다. <로얄어페어> 속 캐롤라인 왕비는 덴마크 왕실로 시집오기 전, 남편인 왕에 대한 기대를 한껏 품고 영국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남편상은 첫날밤부터 깨지고 만다.

남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왕비에게, 아내를 배려할 줄 모르는 남편의 거친 손길은 남편에 대한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하나 더, 남편은 편집증이 있었다. 공연 중 혹여 마음에 들지 않는 대사라도 있으면 즉석에서 뜯어고치길 바라는 편집증 환자였다. 덴마크 왕실의 분위기 역시, 친정인 영국과는 달리 검열이 판을 쳐 질식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 펼쳐진다.

이러던 차에 왕비에게는 한 줄기 단비 같은 남자가 나타난다. 왕실 주치의 스트루엔시다. 스트루엔시와 캐롤라인 왕비의 불장난이 단지 육체적 관계에만 머물렀다면 단지 그녀의 불륜, 혹은 남편과의 소통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대체 소통’ 정도의 분석에 머무르겠지만 영화는 두 남녀의 관계를 단순하게 육체적 소통의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는다.

캐롤라인 왕비는 스트루엔시와 자유주의 사상의 단꿈을 나눈다. 유독 중세의 패러다임에 고착함으로 말미암아 백성을 배려할 줄 모르던 덴마크 왕실의 질식사할 것만 같은 덴마크 의회 분위기에 맞설 동지를, 왕비는 한 명 더 얻은 셈이다. 하지만 스트루엔시라는 정신적 동지를 얻은 건 왕비만은 아니었다. 왕 역시, 살짝 맛이 가기는 했지만 개혁의 기치를 같이 할 정신적 동지로 스트루엔시를 택했기 때문이다.

개혁이라는 건 기득권층이 갖고 있던 유리함과 이익을 어느 정도 양보해야 감당이 가능한 일이다. 만일 왕실이 추진하려는 개혁안이 기득권층의 이익에 침해를 가한다면 기득권층은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예방 접종 확대나 보육원 설립 등의 일은 기득권층의 세금을 늘려서 걷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기에 기득권층에게 덴마크 왕실의 개혁은 달가운 일이 아니라 저지해야 할 일이다.

<로얄어페어>는 두 종류의 코드로 읽으면 흥미로운 영화다. 먼저 소통이라는 코드로 읽어보자. 부부, 그러니까 덴마크 왕인 크리스티안7세와 캐롤라인 왕비 서로가 소통이 통하지 않는 ‘소통 불가’ 현상은 왕실 주치의 스트루엔시를 통해 해소된다. 스트루엔시는 왕과, 그리고 왕비와 개별적으로 소통을 맺는 특이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스트루엔시는, 왕에게는 유일한 친구이자 왕비에게는 기둥서방이자 동시에 개혁의 동지가 된다.

두 번째는 기득권층의 저항이라는 코드다. 먼저 밥그릇을 차지한 자는, 자기의 밥그릇을 건드리는 일이라면 목숨 걸고 밥그릇을 건드리지 못하게끔 만든다. 크리스티안7세와 스트루엔시의 개혁안에 기득권층이 그토록 목숨 걸고 반대하고, 그것도 모자라 모략과 중상을 일삼는다는 건 그만큼 기득권층 자신들의 밥그릇을 내놓기가 싫다는 반증이다.

다른 유럽에 비해 덴마크가 개혁에 뒤쳐질 수밖에 없던 건 기득권층의 막강한 저항 때문이라는 걸 <로얄어페어>를 통해 읽을 수 있다. 한데 이들 덴마크 귀족들의 밥그릇 싸움은 비단 18세기 덴마크에만 국한하는 사실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층의 밥그릇 사수는 계속 이어졌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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