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생각했던 목적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가 이런 케이스다. 예수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함께할 것을 목적으로 접근했던 마리아가 예수와의 동침이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가 되는, 처음에 목적한 것과는 달라지는 결과처럼 말이다.

<반창꼬> 역시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처럼 애초 목적과 나중의 결과가 다른 영화다. 의사 미수(한효주 분)는 의료 소송을 당한다. 여자 환자를, 남편의 단순 폭행으로만 치부하고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고 퇴원시킨 게 화근이었다. 여자 환자는 퇴원 후 뇌사상태에 빠지고 미수는 의료 소송을 당한다. 만일 이 의료 소송에서 미수가 패한다면 그야말로 청천벽력, 의사직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하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여자 환자의 남편에게 폭행당한 소방관 강일(고수)이 남편을 고소만 해준다면 의료 소송이 미수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미수는 강일에게 환자의 남편을 고소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한다. 그럼에도 미수는 강일의 고소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강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강일을 향한 미수의 의도적인 접근은 분명 고소장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지 강일과의 연애를 위함이 아니다. 하지만 강일을 만나는 과정에서 미수는 강일에게 호감을 느끼고 강일과 사랑에 빠진다. 고소장을 받아내기 위한 의도적인 접근 가운데서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의 창녀 막달라 마리아처럼 목적이 전도된 것이다.

<반창꼬>는 씨줄과 날줄처럼 두 가지 이야기를 한 영화 가운데 묶고자 한다. 하나는 강일과 미수의 러브라인이고, 다른 하나는 소방관의 휴먼스토리다. 전자는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 중 하나를 답습한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티격태격하던 앙숙인 남녀가 커플로 맺어지는 것이다.

<반창꼬> 속 강일과 미수 역시 처음에는 티격태격한다. 미수는 강일이 고소장을 제출해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소방 자원봉사를 나선다. 하지만 강일은 이런 미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맘에 들지 않는다. 물과 기름 같던 강일과 미수가 사랑하는 커플로 결합하는 설정은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답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소방관의 휴먼스토리로 <분노의 역류>의 방식으로 소방관의 애환을 묘사한다. 철길 한가운데 사고가 난 차량 속 운전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차량을 철길에서 밀어내는 소방관들의 헌신적인 모습, 사고 현장에서 건물 붕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인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강일의 모습 등을 통해 소방관의 인간애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영화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살리고자 최선을 다하는 소방대원의 휴먼스토리와 미수와 강일의 러브스토리를 함께 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방대원의 일상은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인간애를 담아내며, 강일과 미수의 애정전선에 위기가 봉착한다는 설정도 익히 드라마에서 보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 강일이 환자의 남편에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게 동정을 드러내는 설정 역시 강일이 왜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납득하기 힘들다. 후반부 역시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고수와 한효주라는 블루칩이 아깝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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