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확실히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하는 직업이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과 사투를 벌여야만 하는 소방관도 그렇고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도 그렇다. 특히 미국은 총기 소유가 합법화된 나라이기에 미국의 경찰은 우리나라 경찰보다 총에 맞을 위험이 높다.

<엔드 오브 왓치>는 미국 경찰 중에서도 언제 갱단의 총알이 날아들 지 모르는 LAPD(로스엔젤레스 경찰국) 우범 지대에 근무하는 경찰의 일상과 애환을 셀프 카메라의 형식으로 그리는 영화다.

영화에 셀프카메라를 이식시키는 시도는 일찍이 구토를 유발할 듯 극심하게 흔들리는 핸드핼즈 기법의 <클로버필드>를 통해 접한 바 있다. 하지만 <엔드 오브 왓치>는 핸드핼즈 특유의 흔들림 없이 경찰의 시각으로 LAPD의 사건 사고를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다.

영화의 두 주인공, 브라이언(제이크 질렌할 분)과 마이크(마이클 페나 분)는 범죄자와 대치하기도 하지만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 어느 때는 없어진 세 살과 한 살의 영아를 찾기 위해 신고자의 집안 곳곳을 뒤지기도 한다.

화재 현장에서는 소방차가 달려오기도 전에 마스크 없이 유독 가스를 뒤집어쓰면서 불길에 휩싸인 저택 속에서 아이 셋을 구하기도 한다. 목숨을 내놓고 아이를 구한 덕에 마이크는 아내와 대판 싸우기도 하지만, 이들은 ‘민중의 지팡이’라는 직업 정신에 투철하게 서민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뛰어든다.

<엔드 오브 왓치>는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 안의 인종 간 갈등을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갱들은 인종과 인종이 섞이질 않는다. 백인과 흑인이 파트너인 <리썰 웨폰> 시리즈처럼 브라이언과 마이크 두 경찰이 인종을 초월하여 우정을 나누는 데 반해 갱스터들은 흑인이면 흑인, 라티노면 라티노끼리 뭉쳐 갱단을 형성하고 다른 인종의 갱단에게는 적대적이다. 다른 인종의 갱단과 갱단끼리의 라이벌 전이 설정이기는 하지만 미국 내 인종갈등을 간접으로 묘사하는 대목이다.

전장을 넘나들며 싸우는 군인들 사이에는 단지 우정 이상으로 이들 사이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혈맹’이라는 것이 있었다. 죽음을 오가는 전쟁에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때로는 부상당한 동료를 저격수의 총구를 무릅쓰고 적의 총탄으로부터 구하려 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확실히 평상 시 민간인의 우정 이상으로 군인들이 혈맹으로 묶여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만일 이들이 혈맹 이상의 관계가 아니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동료를 구하려 할 이유가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브라이언과 마이크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우범지대의 총격전 속에서 혈맹을 맺어온 파트너 관계다. 마치 전장 속 군인들이 총과 칼의 위협 속에서 혈맹을 키워온 것처럼 이들 브라이언과 마이크는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우정 이상의 혈맹을 맺는다.

폐쇄된 공간 안에서 우정을 나누는 두 경찰의 우정 쌓기는 ‘폐쇄된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특징을 가진다. 혈맹으로 맺어진 이들 파트너의 우정은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순찰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서로에게 전한다.

가택이나 건물에서 갱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것, 더불어 순찰차 안에서 농담 따먹기를 통해 우정을 쌓는 것 역시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이뤄진다는 특징을 가진다. 폐쇄 공간 안에서 두 남자의 우정이 쌓이는 걸 보여주는 영화가 <엔드 오브 왓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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