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고아원에서 자란 두 루마니아 아가씨가 있다. 이들의 이름은 알리나와 보이치타. 알리나가 독일에 있는 사이에 보이치타는 정교회의 수녀가 되어 있었다. 세속과 등지고 사는 정교회 수녀 친구와 같이 있기 위해서는 종교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알리나가 보이치타의 정교회 안에 있어야만 했다. 이에 알리나는 보이치타의 정교회에 들어가 보이치타와 같은 숙소에 있게 된다.

<신의 소녀들>은 우리나라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와 궤를 같이 하는 영화다. <여고괴담>은 여고 안에 감춰진 귀신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들 여고생의 우정과 동성애 사이를 오가는 시리즈 아니던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여고생의 심리를 귀신이라는 매개물로 대변하는 프랜차이즈가 <여고괴담>이다.

<여고괴담>과 마찬가지로 <신의 소녀들>은 두 아가씨의 우정 혹은 그 이상의 이야기를 초반부를 통해 <여고괴담>의 톤으로 묘사한다. 만일 알리나와 보이치타의 관계를 우정 이상의 관계로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면 영화는 보이치타의 숙소 안에서 알리나가 웃통을 벗고 누운 장면을 굳이 삽입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알리나는 보이치타와 끈끈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 하지만 보이치타는 신의 딸이라는 수녀의 타이틀을 벗어나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알리나는 보이치타와 함께하기 위하여 정교회 안에 있지만 종교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가치관은 언젠가는 충돌하는 법.

신부가 보이치타와 함께하기를 허락하기는커녕 그녀와 떨어뜨려 놓으려만 하니 이 지점으로부터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신부와 알리나의 가치관이 충돌하면서부터 말이다. 보이치타와 함께하기 위하여 자기 가진 걸 모두 정교회에 바친다.

하지만 기껏 신부로부터 돌아오는 건 보이차타와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교회 바깥으로 알리나를 내쫓으려 하니 얼리나는 못 견딜 수밖에. 알리나는 보이치타와 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 앞에 몸서리를 치고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하지만 정교회의 신부와 수녀는 이를 귀신이 일으킨 발작으로만 생각하고 알리나의 히스테리를 퇴마의식으로 교정코자 한다. 알리나의 온 몸을 나무판 위에 묶고 입에는 재갈을 물려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후 귀신을 쫓는 퇴마 기도를 읊는다. 멀쩡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견디지 못할 엑소시즘이다.

사실 알리나는 귀신 들린 게 아니라 보이치타를 갖기 위한 집착이 정교회 신부로부터 방해받아 히스테리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정교회 신부와 수녀는 이를 귀신들림으로 착각하고 알리나를 귀신으로부터 구한답시고 강제로 퇴마 의식을 거행한다.

이는 보이치타를 갖고 싶어 하는 알리나의 ‘자유의지’와, 자신의 프레임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정교회의 ‘파시즘’으로 읽을 수 있다. 알리나의 내면을 보지 못한 채 알리나의 증상만으로 귀신 들렸다고 판단한 채 그를 교정한답시고 강제로 묶어놓고 퇴마 의식을 거행하는 파시즘 말이다.

알리나는 보이치타를 원했지만 정교회는 알리나의 퇴마를 바랐다. 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정교회의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더불어 이 증상을 귀신들림으로 진단함으로 알리나를 교정하고자 하는 신부와 수녀의 파시즘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신의 소녀들>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식의 틀, 쉐마가 세상의 전부인 프레임인 양 착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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