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차원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박승규)의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KBS 정연주 사장의 사퇴 문제를 둘러싸고 시민사회단체와 KBS본부가 평행선을 그으면서 '공영방송 장악 시도'를 반대하는 운동 진영의 구심점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정권 차원의 전방위적인 압력으로 사회적 위기감이 증폭되면서 KBS본부의 '중심잡기'를 촉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정 사장 사퇴 투쟁이 아니라 '공영방송 장악 반대 투쟁'으로 KBS본부의 무게 중심이 옮겨져야 한다는 '새언론포럼'(언론노조 전·현직 출신 언론인 모임)의 27일 성명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최근 KBS본부는 오히려 사장 퇴진 투쟁의 강도를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정리했다. 27일 집행부 워크숍에서 이같은 결론을 내린 KBS 본부는 2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08 국제 방송,음향,조명기기 전시회'(KOBA) 개막식장에서 사장 퇴진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열 예정이었으나 정 사장이 참석하지 않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

▲ 지난 4월22일 비대위 출범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박승규 본부장(맨 앞 오른쪽) ⓒ서정은
"방송구조 개편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고 KBS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해법은 정연주 사장의 퇴진 뿐"이라는 것이 KBS본부의 변함없는 주장이지만 KBS를 둘러싼 안팎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급박하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해부터 수신료 인상 움직임을 계기로 한나라당 등 보수진영에서는 정연주 사장의 퇴진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방만 경영' '코드 방송'의 책임을 지고 정 사장이 물러나지 않는 한 KBS 수신료 인상은 불가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이후 정권이 교체되고 '최시중호' 방송통신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KBS를 둘러싼 환경이 새롭게 재편됐고, '반 정연주'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KBS본부도 정 사장에 대한 퇴진 요구를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각을 세웠다.

한나라당, 보수언론, KBS본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바위처럼 버티겠다"며 정 사장이 쉽게 물러날 뜻을 내비치지 않자 정권 차원의 압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김금수 KBS 이사장을 만나 한미 쇠고기 수입 협상 파문을 다룬 KBS 보도에 불만을 표시하고 정 사장의 조기 퇴진 문제를 언급한 사실이 드러났고, 김 이사장은 이러한 내용이 공개된 사실에 책임을 진다며 돌연 이사장직을 내놨다. 친한나라당 성향의 KBS 이사들은 '정연주 사장 조기사퇴 권고 결의안'을 추진해 압박을 가할 태세이고, 평소 '공영방송 사장 임기 보장'의 필요성을 말해 온 신태섭 이사(동의대 교수)에게는 교육부와 대학 총장이 나서서 사퇴 압력을 행사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감사원도 이에 화답했다. 보수단체들이 제기한 KBS 특별감사 신청을 받아들여 이르면 6월부터 감사에 나설 예정이다. 언론계에서는 이를 두고 정 사장을 몰아내기 위한 '표적감사' 의혹을 제기하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 사장에 대한 전방위적인 퇴진 압력이 이어지자 시민사회단체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언론시민단체와 언론현업단체들은 연일 성명과 기자회견을 통해 정연주 사장에 대한 정권 차원의 퇴진 압력과 공영방송 장악 음모를 규탄하고 나섰다. 언론계, 종교계, 학계, 문화예술계 등 각계 원로 151명도 27일 "임기가 보장된 공영방송의 사장을 쫓아내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이라며 정 사장 교체 반대를 선언하고 나섰다.

▲ 언론계, 종교계, 학계, 문화예술계 등 각계의 원로 151인이 지난 27일 오후 2시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공영방송 독립성 수호 및 공영방송 지키기' 기자회견을 열었다. ⓒ송선영
이들이 말하는 핵심은 이렇다. 이명박 정부에서 공영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임기가 남은 정 사장을 밀어내고 정권과 코드가 맞는 사람을 사장으로 앉히려고 할텐데, 이를 지켜내지 못하면 방송의 독립성은 요원해지고 우리사회 민주주의와 공공성도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 사장 문제를 바라보는 평가와 시선은 다양하겠지만, 현 시점에서 'KBS 정연주'가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음모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상징적인 아이콘이 돼 버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KBS본부는 어떤 행보를 취해야 할까. 기존의 기조를 계속 밀어붙여 정 사장 퇴진에 주력한다면 내부 동력은 물론 외부의 지지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뻔하다. 각계의 정 사장 퇴진 반대 지지 선언이 계속되는 마당에 정 사장도 이제와서 자진 퇴진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KBS본부가 정 사장과의 명분없는 싸움만 계속한다면 KBS 내부의 갈등과 반목, 무기력증은 점차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전략을 수정해 정 사장 퇴진 문제가 아니라 공영방송 장악 저지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언론노조,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스스로 오류를 인정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겠으나 KBS의 미래를 생각해서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기 투쟁 방향'을 안건으로 27일 열린 KBS본부 집행부 워크숍은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표적감사' 논란을 빚고 있는 감사원 특별감사를 기점으로 해서 KBS본부가 전략을 수정하는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런 기대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회의 결과는 이런 모든 기대를 무너뜨렸다. 기존 기조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정 사장에 대한 퇴진 투쟁 수위를 더 높이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전해졌다. 몇몇 집행간부들이 "정 사장 퇴진 투쟁은 이제 의미가 없다"며 반대 의견을 표명했지만 '대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고 이들은 더는 노조 활동을 함께 할 수 없다며 현업 복귀 의사를 밝힌 상태다.

"정 사장이 지금 물러난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독립된 사장을 선임할 힘이 없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방식의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소수의 의견이었지만 KBS본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정 사장을 퇴진시키는데 주력하면서 차기 사장 선임제도를 위한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정연주 KBS사장 ⓒKBS
KBS본부의 최종 투쟁 방향은 다음달 4일 예정된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결론이 난다. 이날 비대위에서도 27일 집행부 회의 결과가 그대로 반영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물론 격론이 펼쳐져 새로운 방향이 모색될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회의적인 반응들이다.

KBS 바깥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KBS 내부는 정체하고 퇴보하는 모습이다. KBS본부가 '정연주 사장 퇴진' 투쟁 기조를 유지하는 한 상급단체인 언론노조와의 관계 개선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의 지지와 연대도 어려워진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KBS 내부 직능단체들도 KBS본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대응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당장 KBS PD협회는 29일 총회를 열고 '정연주 사장 사퇴론'의 실체를 짚는 등 KBS 위기 극복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KBS본부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KBS 내부 동력도 한 곳으로 모아내지 못하고 외부 연대세력도 없는 상황에서 정권의 전방위적인 공세를 막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것인가, 오기인가, 아니면 다른 속셈인가. KBS의 위기는 단지 KBS 구성원들만의 위기가 아니다. KBS본부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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