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터>에서 주인공 더치(아놀드 슈왈츠네거 분)는 CIA 요원인 딜론(칼 웨더스 분)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던진다. “우린 소모품이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더치와 그의 부하를 이용한 딜론마저도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디스하는 대사다.

<007 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 분)는 MI6 요원을 살해한 괴한과 뒤엉켜 싸운다. 이브(나오미 해리스 분)는 적을 저격하기 위해 방아쇠를 겨누지만 차마 쏠 수가 없다. 자칫하면 제임스 본드가 총에 맞을 수 있어서다. 이런 이브에게 M(주디 덴치 분)은 방아쇠를 당길 것을 명령한다. MI6의 제임스 본드 역시 M의 입장에서 보면 소모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007 스카이폴>에는 역설이 드러난다. MI6는 이전의 악당과는 다른 종류의 악당과 직면한다. 이전에 MI6 혹은 제임스 본드가 상대하던 적은 대개 세계 정복이나 금전적 야망에 전도된 적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가 새로이 맞이하는 적은 M에게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전의 적들처럼 세계 정복이나 금전적인 이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새로운 적, 실바(하비에르 바르뎀 분)는 M을 비롯한 MI6 제거가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실바 역시 제임스 본드와 마찬가지로 M에게 소모품 대우를 당하던 전직 MI6 요원이기에 자신을 소모품 취급한 M에게 앙갚음하고자 한다. M에게 당한 만큼 고스란히 되돌려주고자 하는 실바의 이러한 모습은 이전의 007 시리즈의 악당처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바에게 ‘사연’을 부여함으로 실바가 왜 그토록 M 및 MI6에게 적대감을 품어야 하는가 하는 설득력을 부여한다.

적에게도 ‘사연’을 제공함으로 <007 스카이폴>은 액션 아드레날린이 뿜어 나올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입체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빚어낸다. 실바가 출연하는 일부 장면은 <양들의 침묵>에 빚지기도 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007 스카이폴>은 ‘소모품의 반란’이다. 하지만 <007 스카이폴>은 소모품의 반란에 마냥 국한되는 영화는 아니다. 실바라는 소모품의 반란에 대항하여 M의 또 다른 소모품인 제임스 본드가 이에 맞서기 때문이다.

<007 스카이폴>은 소모품에 관한 이야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설을 담는다. 소모품 실바에 의해 ‘디스’를 당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소모품인 제임스 본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역설을 담기에 그렇다.

소모품이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본다면 보면 실바와 제임스 본드는 ‘쌍생아’다. 한 쪽은 버려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지만 그럼에도 다른 한 쪽은 자신을 버린 상사를 버리지 않는 의리를 보여준다.

또 하나, <007 스카이폴>은 디지털 세대에 ‘역행’하는 영화다. 확실히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는 첨단 테크놀로지의 수혜를 톡톡히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하는 제임스 본드는 더 이상 테크놀로지의 수혜를 받는 디지털 첩보원이 아니다.

주먹다짐이 난무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날로그 방식의 액션 마초이즘을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를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오는 아날로그의 전사가 제임스 본드다. 이렇듯 복고 열풍은 첩보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