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이사회가 25일 '2007 경영평가 보고서'를 의결하면서 보고서 내용과 다른 평가 내용을 방송문안에 포함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사실상 정연주 사장의 책임을 묻겠다는 정치적 의도로 해석되는 내용이 방송문안에 전격 포함되자 '경영평가 보고서'를 작성한 외부 평가위원들이 강력 반발하며 법적 대응 방침까지 밝히는 등 파문은 계속될 조짐이다.

KBS 이사회는 25일 임시이사회에서 '2007 경영평가보고서'를 심의·의결하고, 오는 31일 KBS 1·2TV를 통해 공표하는 방송 문안에 "KBS의 2007년 경영 성과는 여러 긍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고 수신료 인상에 실패하였으며 인사제도 개혁에도 성과를 내지 못함으로써 경영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는 내용을 추가해 의결했다.

외부 평가위원들 "이사회 평가 동의할 수 없어…출처 밝히고 방송해야" 반발

▲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사옥 ⓒ미디어스

그러나 이날 임시이사회는 "(방송문안 추가 관련) 이사회의 일방적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외부 평가위원들의 강력한 항의로 7시간이 넘는 격론이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 도중 일부 이사와 평가위원들에 의해 수정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논란 끝에 '보고서와 방송문안이 다른' 원안대로 처리됐다. 이날 회의에는 최근 사의를 표명한 김금수 이사장을 뺀 이사 10명이 참석했다.

이날 이사회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사들은 평가위원들이 제출한 방송문안에 '경영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문단을 추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평가위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는 등 논란이 벌어졌다. 평가위원들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사들이 이를 통과시키자 평가위원들은 "합의점을 찾아 우리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방송을 하던지, 아니면 평가위원이 아닌 이사회 평가라는 주체와 출처를 명확하게 밝힐 것"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이사회는 평가위원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평가단와 이사회가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안될 경우 결의한 바대로 간다"는 입장을 정하고 이사회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평가위원들은 본인들의 이름으로 31일 관련 내용이 방송될 경우에는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경영부문 평가위원인 양혁승 교수(연세대 경영대학)는 26일 "평가위원의 이름이 들어간 상태에서 방송이 된다면 이것은 인격권에 관련된 문제"라며 "(평가위원들이)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임의로 이사회가 의결할 수 있는지 방송법 조문을 따져 대응할 계획이다. (평가단과의 접점을 찾는 노력과 관련해) 이사회로부터 아직 연락을 받은 것은 없다"고 밝혔다.

양 교수는 "내가 맡은 경영파트를 종합하면서 방송문안 내용을 정리했는데 이사회가 추가시킨 문구는 총평으로 넣기에도 어려운 수준"이라며 "경영평가 보고서에 KBS의 개선사항을 모두 담았지만 이것이 경영진에게 당장 책임을 물을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양 교수는 이어 "이사회의 위촉을 받아 6개월 동안 학자적 양심과 전문가적 양심에 따라 KBS를 평가했다"며 "이사회가 25일 결의한 내용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평가위원들의 결론인 것처럼 방송될 경우 후속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례적인 경영평가 보고서 관여…'정연주 흔들기' 정치적 의도"

KBS 이사회는 현행 방송법에 따라 '경영평가단'을 구성해 KBS의 경영목표 타당성, 예산집행 효율성, 인사·조직관리 실태, 재무상태 등을 평가한 뒤 매년 5월 그 결과를 방송을 통해 공표해야 한다. KBS 이사회는 2007년도 경영평가를 위해 지난해 11월, 회계(이범열 공인회계사)·경영(양혁승 연세대 교수)·기술(강태인 전 KBS TV기술국장)·방송(이범수 동아대 교수, 김훈순 이대 교수) 부문에 6명의 외부 전문가와 KBS 감사 1명 등 모두 7명의 평가위원을 위촉한 바 있다.

▲ 동아일보 5월 26일자 2면
평가위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KBS 이사회가 이처럼 이례적으로 무리수를 둔 배경에는 최근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연주 사장 퇴진 압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KBS 한 관계자는 "외부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듣기 위해 전문가들로 평가위원을 위촉해 경영평가를 하는 것인데 여기에 이사들이 일일이 관여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과거에도 이사들이 보고서와 방송 내용에 관여한 전례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따라서 '정연주 사장 사퇴권고 결의안'을 추진하려던 친 한나라당 성향의 일부 이사들이 정 사장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경영평가 내용을 부정적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실제로 '2007 경영평가보고서'는 KBS에 대한 경영 전반의 평가와 개선점이 지적됐으나 정연주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에게 심각한 책임을 물을만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KBS 이사회의 의결 소식이 다음 날인 26일자 조중동에 나란히 실린 것을 두고도 정 사장에게 압박을 가하려는 언론플레이가 아니겠냐는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조선일보는 실제로 이날 "KBS 이사회 '정사장 경영 실패' 평가" 제목의 기사에서 방송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지난 정부에서 추천한 이사들이 주축을 이룬 KBS 이사회 구성을 감안했을 때 이런 부정적 평가를 내린 것은 사실상 정 사장의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KBS 경영 최고 의결기관 이사회, 모든 경영 실패는 정연주 책임?"

정 사장 퇴진 압박을 위한 정치적 의도 뿐만 아니라 KBS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책임을 지는 이사회가 외부 경영평가단이 동의하지 않는 내용까지 포함시키면서 무리수를 둔 것은 "스스로 발등을 찍는 격"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KBS 경영을 전반적으로 감독할 책임이 있는 이사회가 정권이 바뀌자마자 정연주 사장 등 경영진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KBS 다른 한 관계자는 "예산을 비롯해 KBS 경영 전반은 이사회의 사전 승인을 모두 받고 있는데 그때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다가 왜 정권이 바뀌니 태도가 돌변하는가"라며 "이사회가 정치적 의도성을 갖고 스스로 발등을 찍으며 자기 행위를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방송법에 따르면 KBS 이사회는 KBS 경영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으로 경영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에 대해 심의·의결권을 가진다. 이사회가 KBS의 경영에 대해 직간접적인 책임을 지도록 돼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따라서 이사회의 직무는 크게 △KBS 기본운영계획에 관한 사항의 심의·의결 △KBS 예산 및 자금계획, 예비비의 사용 및 예산의 이월, 결산의 심의·의결 △경영평가 및 공표 △사장 및 감사 제청권한 △지역방송국 운영 및 기타 재정운용에 관한 사항의 심의·의결 등 경영 전반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또한 이사회가 '부정적 평가'의 근거로 제시한 수신료 인상 실패와 만성적인 적자 구조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수신료 인상의 실패가 정연주 사장 등 KBS 경영진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는가도 논란이다. 방송법에 따르면 수신료 인상은 KBS 이사회가 심의·의결한 후 방송위원회를 거쳐 국회의 승인을 얻도록 돼 있다. 문제는 KBS 이사회가 승인한 수신료 인상 금액이 27년만에 방송위를 거쳐 국회 문광위까지 올라갔으나 정치적 힘 겨루기 속에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됐다는 점이다. 따라서 KBS 이사회가 KBS 경영 전반에 대한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수신료 인상의 사회적 필요성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못한 점을 국민에게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KBS 경영 상황이 '만성 적자'로 고착화됐는지와 그 책임 소재에 대해서도 면밀한 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동안 KBS 이사회와 경영진, 구성원들은 한목소리로 "수신료 인상이 되지 않으면 KBS 재정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KBS 경영진의 능력과 책임 탓으로 만성 적자 상황이 도래한 측면이 더 크다면 수신료 인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국민들을 상대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이와 관련해 "KBS의 적자 상태가 만성인지 아닌지 여부는 이사회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을 것"이라면서도 "이번 평가보고서는 2007년도에 대한 보고서이고 2007년도의 적자 상황은 적시했다. 그러나 2006년도는 법인세 환급 등으로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만성인지 아닌지 여부는 해석이 달라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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