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2년 군인 출신 프랑스 작가 라클로에 의해 세상 밖에 나온 이래 수많은 이들의 손을 거친 작품이건만, 멜로의 대가 허진호 감독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위험한 관계>는 참으로 발칙한 영화다. 어떻게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을까. 그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에 길들여진 관객들도 영화 속 등장인물들보고 혀를 끌끌 찰 판국에, 처음으로 이 소설을 접한 고귀하신 프랑스 귀족들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1931년 일제 치하에 있던 상하이로 무대를 옮긴 <위험한 관계>의 등장인물 설정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타고난 부와 외모로 상하이의 모든 여자를 자기 품으로 끌어들이는 천하의 바람둥이 셰이판(장동건 분). 그런데 그의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정숙해 보이는 여자 뚜펀위(장쯔이 분)이 눈에 밟힌다. 그때 셰이판의 전 애인이자 상하이의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미모의 모지에위 부인(장백지 분)은 자신의 애인 진사장이 어린 여중생 '베이베이'에 눈이 먼 것에 질투를 느끼고, 셰이판에게 '베이베이'를 유혹해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모지에위 부탁을 단박에 거절한 셰이판은 대신 모지에위에게 '뚜펀위와의 하룻밤'으로 은밀한 내기를 제안한다.

처음에 셰이판이 정숙한 미망인 뚜펀위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때 모지에위는 코웃음을 쳤다. 제아무리 수많은 여자들을 울리는 카사노바 셰이판이라고 해도 뚜펀위만은 힘들다고 믿었다. 그런데 웬걸 뚜펀위가 셰이판을 거절하면 할수록 셰이판은 뚜펀위를 가지기 위해 몸부림친다. 단순히 모지에위와의 내기에서 이기고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전까지 수많은 여자들의 치맛폭을 거치면서도 한 번도 누구를 사랑한다고느끼지 못했던 셰이펀은 난생처음 그녀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모지에위와의 게임에서 지고 싶지 않았던 셰이펀은 엄청난 무리수를 두게 되고, 결국 세 남녀는 예측불허의 파국을 맞게 된다.

상하이의 밤을 사로잡는 셰이판과 모지에위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물론 셰이판은 모지에위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그 많고 많은 여자 중에 사랑하는 이는 당신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모지에위는 안다. 사람의 마음을 거래하듯 사고팔 수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사랑'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의 투정이다. 셰이판과 모지에위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순수한 감정을 조종했고 농락해왔다. 정숙한 부인으로 살고 있는 뚜펀위도, 곧 돈 많은 진회장과 결혼을 앞두고서도 가난한 화가 지망생 완조를 사랑하는 베이베이의 마음도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될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어디 그렇게 기계처럼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던가. 자신들의 헛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토끼 한 마리 건드렸다가 되레 자신이 걸어놓은 덫에 제대로 걸려버린 셰이판과 모지에위는 뒤늦게야 자신이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되지만 버스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원작에서도 그랬듯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가치조차 게임으로 받아들이는 1930년대 상하이의 화려한 사교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사랑'의 숭고함을 부르짖는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이후, 중국으로서는 상하이가 일본에게 점령되는 치욕적인 시간이었지만 상하이의 귀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만 급급하다. 그들은 겉으로는 고상한 척 하지만, 실상은 아직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한 소녀들을 노리는 사악한 늑대요, 신분상승을 위해 어린 딸을 돈 많은 바람둥이에게 팔아버리는 속물들이다.

하지만 자기 밖에 모르는 카사노바와 죽은 남편의 유지를 이어 자선사업에 열중하는 열녀라는 극과 극의 대척점에 서있는 셰이판과 뚜펀위를 가까이 이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당대의 흉흉한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게임'이라는 불순한 계기로 시작한 두 남녀의 관계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으며, 셰이판 머리 꼭대기 위에서 그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지에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내 뜻대로 이뤄질 수 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랑'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라면 결국 내게 넘어 오게 돼있어"라고 자신하였지만, 한 번도 믿지 않은 '사랑'에 제대로 발목잡혀버린 셰이판을 통해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허진호 감독의 대표작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를 빌려. "어떻게 사랑가지고 장난칠 수 있어요." 역시나 허진호 감독, 한동안 잃어버린 사랑의 감정까지 제대로 자극해버리는 정통 멜로, 참으로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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