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의 그 흔한 결말, 이를테면 신데렐라 혹은 백설공주의 결말인 ‘두 사람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는 결말을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둘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동화를 그대로 믿는 어린이거나, 혹은 아직 사랑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독신이거나 혹은 청춘이거나.

▲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음식이나 약품만 유통기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귓속에서 종소리가 들리고, 데이트 중 어쩌다 손을 잡기라도 하면 짜릿한 전류가 흐르던 마법의 시절이 부부의 결혼 생활 내내 지속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연애 초기의 가슴 두근대던 사랑의 마법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아마 사랑의 유통기한이 없다면 이별이나 불륜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사랑을 끝내다>는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한 후, 사랑하던 두 남녀에게 남은 ‘사랑의 시체’를 무덤에 봉인하는 연극이다. 여기, 한 쌍의 남녀가 있다. 하지만 이들 남녀가 나누는 이야기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여기서는 독백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아직은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하나 독백은 두 사람 사이에 소통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고 종료된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상대를 향한 비난이나 악다구니보다 더욱 비극적이고 처연한 건 바로 ‘소통의 부재’라는 사실이다.

상대를 향한 대화가 아닌 소통의 단절이란 점은, 무려 한 시간에 달하는 독백이라는 긴 시간의 독백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더군다나 쌍방 간의 대화라면 화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독백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여지를 단절한 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퍼붓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독백이라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안에서는 소통은커녕 극적인 화해는 타진할 수조차 없다. 독백은 소통의 부재뿐만 아니라 화해라는 극적인 가능성마저 차단하고야 만다.

상대방을 누가 더 많이 사랑하였는가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보다 많이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독백을 퍼부을 때 여자는 흐느끼기만 할 뿐 무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자를 향한 남자의 60여 분의 독백이 끝난 후 여자가 남자를 향해 60여 분의 독백을 퍼부을 때 남자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무너진다. 여자를 향한 남자의 독백의 강도보다, 남자를 향한 여자의 독백의 강도가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자는 남자 자체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남자와 함께 하던 매 순간을 사랑했다. 심지어는 남자의 똥마저도.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남자가 싼 냄새 나는 똥까지 사랑하는 여자가 그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그를 더 이상은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을지라도 여자의 똥까지 사랑했었다고 남자는 말하지 못했다.

남자를 향한 여자의 사랑이 그토록 강렬했기에, 여자에게 독백을 퍼부은 남자가 마지막에 여자의 독백을 통해 자신을 향한 여자의 사랑이 보다 컸음을 깨닫고는 무너진다. 하지만 이미 사랑이라는 기차는 떠난 지 오래.

더 많이 사랑한 쪽이 상처 또한 많이 받는 법이지만, <사랑을 끝내다>는 반대로 사랑을 많이 받은 남자가 여자보다 크나큰 상처를 받고 무너지고야 만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임을 새삼 각성하게 만들어주는 남자의 마지막 무너짐은, 사랑을 주는 것보다는 상대에게 많은 걸 받기를 바라고 요구하는 요즘의 세태에 각성을 주는 역설이기도 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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