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정부종합청사. 그곳에서 일하는 게 원대한 꿈이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꿈은 꿈대로 흘러갈 뿐, 나의 시간과 경험은 꿈과 별개로 지나갔던 것 같다. 어느덧 내 나이 28세. 나는 지난달 17일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 입사하게 됐고, 풋내기 수습기자로서 국정감사 취재를 하기 위해서 8일 경기도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됐다. 당초 김재철 MBC 사장이 출석하기로 돼 있었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때문이었다.

▲ 8일 환노위 국감에 출석한 파완 고엔카 마힌드라 사장(왼쪽)의 모습. 김재철 사장은 여야 합의에 따른 증인채택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출장을 떠나 국감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디어스

처음 맞닥뜨린 '대형취재'에 너무 긴장해서 였을까? 아니면 먼 거리를 무거운 노트북을 짊어진 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월드스타 '겨땀 싸이'가 부럽지 않을 만큼 땀이 셔츠를 흥건히 적셨다. 여유있게 노트북을 설치하고 기사를 쓰는 베테랑 기자들 옆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리바리하고 있는 나. 딱딱한 건물 속 대회의장에 가득한 빡빡한 사람들, 그리고 찰칵찰칵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셔터, 의원들의 거침없는 호통과 날선 공방 등 국정감사만의 '스펙터클'은 분명 존재했으나 의원들의 발언을 모두 담아야 하는 수습의 운명에 무언가를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특기(特記)할 만한 것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라마다 다른 '사장님 스타일'을 말하고 싶다. 8일 환노위 국감에서는 당초 김재철 MBC 사장이 증인으로 출석해 MBC 사태에 대한 집중 질의가 예정됐었다. 하지만 김재철 사장은 여야 합의로 채택된 증인 출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5일 불출석 사유를 내고 이미 베트남으로 출장을 떠났고, 김재철 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대신 명패만이 놓여 있었다. 김재철 사장이 불출석한 이유는 5일부터 5박 6일간 진행하는 '베트남 해외출장' 사전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본행사 한 달 전에 열리는 사전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올 한 해 언론계를 비롯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MBC 사태의 책임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김재철 사장과 일면식도 없지만, 그의 '몰상식한' 행동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그 이유는 그의 빈자리 옆에, 국정감사를 위해 인도 뭄바이에서 날아온 '파완 고엔카 마힌드라 사장'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 부끄러움은 나만 느낀 게 아니었다. 신계륜 환경노동위원장은 "MBC 김재철 증인은 국정감사가 시작되니까 나오기 싫어서 고엽제 행사한다고 베트남까지 갔다"며 "반면 뭄바이에서 여기까지 오신 분이 계시고 너무나 비교가 된다"고 말했다.

2011년 쌍용차를 인수한 마힌드라의 파완 고엔카 사장은 그날 국감에서 정리 해고자 문제 해결에 대해 말을 아껴 강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국회의 출석 요구를 기피하지 않은 것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 고엔카 사장은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의무"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쌍용자동차와 마힌드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회사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의견을 충실히 듣고 비판점을 조금이나마 수용하고자 하는 자세만큼은 한국의 방송사 사장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실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꼼수'를 부려 국회에 나오지도 않은 김재철 사장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 국감 출석 전 돌연 해외 출장을 떠난 김재철 MBC 사장(왼쪽)과 배석규 YTN 사장(오른쪽).

'드르륵'. 8일 국정감사를 취재하던 중 문자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배석규, 내일(9일) 문방위 국감 증인출석 앞두고 6일 프랑스 출국 확인' 배석규 사장의 프랑스 출장 사실을 전한 문자였다. 역시나 자진해서 '방송사 사장님 스타일'을 입증하는 배석규 YTN 사장. 이제는 이들을 묶어 '용형호제(龍兄虎弟)'라 일컬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매서운 호랑이 같이 기자들을 징계로 물어뜯고, 날렵한 용처럼 국감 직전에 하늘로 승천하니 말이다. 찾아보니 배석규 사장은 51년생, 김재철 사장은 53년생이다. 그럼 배석규 사장이 용이고 김재철 사장은 호랑이인가?

사수의 지시에 따라 국감 도중 '배석규 사장의 출국' 사실을 취재하기 위해 YTN 회사측에 전화했더니, YTN 홍보팀장은 친절하게도(?) 자료를 하나 보내줬다. "(해외출장은) 오래 전부터 협의해 왔던 사안"이고, "본사 사장이 국감장에 출석할 수 없게 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내용이었다. MB정부 출범 이후 6명의 기자들이 일시에 해직되는 등 가장 먼저 '타격'을 받았던 YTN. YTN 사태 초기부터 벌어진 정권 차원의 불법사찰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했던 수많은 국민들의 알 권리가 과연 해외 출장 업무보다 가벼운 것일까?

한국의 재벌가 회장들을 비롯해 방송사 사장들에게는 '그들만의 고정된 패턴'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답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회피하고, 경영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는 징계로 화답한다는 것. 대한민국 재벌가 회장들도 횡령, 탈세, 배임, 폭행 등 중대 범죄를 저지른 뒤, 휠체어를 타고 기자회견을 한다. 눈물의 기자회견이 조금 지난 뒤 돌아오는 것은 특별사면. 방송사 사장들은 국민의 눈을 피하기 위해 휠체어 대신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생활에 복귀할 것이다. 국민의 눈과 귀가 두렵지 않은 이들을 우리사회가 어떻게 견제하고 제어해야 할지, 막 첫 발을 뗀 기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에 새삼 어깨가 뻐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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