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0년 이래 디즈니는 기존 동화 속 공주들보다 한층 더 적극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상을 지향해왔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공주(미녀)님은 잘생기고 권력도 있고 돈도 많은 왕자님과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였다. 그나마 디즈니 공주 이야기 가운데 최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라푼젤>이 이전 디즈니가 보여줬던 공주들보다 한층 진취적인 역동성을 구축하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근 개봉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디즈니와 픽사가 합병한 이래 처음 선보이는 공주님 이야기라서 그런지 <라푼젤>보다 한층 더 나아가, 남성의 도움 없이 본인의 뛰어난 능력만으로 왕국을 화합시키고 위기를 해결하는 '유능한 리더'로서의 역할이 강조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맨손으로 무시무시한 곰을 잡은 아버지의 기개를 닮아 활도 잘 쏘고, 말타기도 능한 메리다 공주는 그녀를 신붓감으로 맞이하고 싶은 웬만한 부족장 아드님들보다 지도자로서 압도적인 재능을 과시한다. 그러나 그녀는 공주 즉 여성으로 태어난 운명으로 왕이 아니라, 왕을 보필해야하는 왕비가 되어야할 팔자다.

메리다에게 기존의 공주, 왕비 역할을 이행하길 바라는 엘리노어 왕비는 고집이 세고 기골이 넘치는 메리다를 이해하지 못한다. 엘리노어 왕비는 전형적인 수동적 여성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부족장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남편인 왕도 말리지 못하는 사내들간의 거친 싸움을 중재하는 것은 지극히 연악해보이는 엘리노어 왕비 몫이다. 어쩜 이 스코틀랜드 왕국은 메리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 엘리노어 왕비가 실질적인 지배자인지도 모른다.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특이하게도 이 왕국은 공주의 결혼 등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왕비도 함께 참석하여 왕비의 의견을 반드시 듣고자 한다.

하지만 제 아무리 현명한 엘리노어라 하더라도, 그녀는 한 왕국을 이끌어가는 왕의 아내일 뿐이다. 부모님이 점찍어준 짝과 억지 결혼하여 평생 갇혀 사는 삶 대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길 원했던 메리다는 부모가 정해준 운명을 단박에 거절한다. 맹랑하게도, 결혼을 강요하는 엄마의 생각을 바꾸게 해달라는 마법의 도움을 얻었다가 되레 엄마를 곰으로 만들어 버린 메리다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이다. 어떻게든 이 못된 마법을 풀어 엄마를 정상으로 돌려놔야하고, 결혼을 파토 낸 본인 때문에 심각하게 뒤틀러진 왕국의 평화도 본인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딸 메리다와 엄마 엘리노어 왕비 간의 갈등은 모녀 갈등을 넘어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자식의 안정된 미래를 위함이라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삶을 아이에게 주입시키지만,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나 아바타가 아니라 엄연한 독립적 인격체이다.

메리다가 엄마에게 반기를 든 것은 자신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자신의 억지 결혼으로 평화를 갈망하는 집안의 바람을 뒤로 하고 자유를 택한 메리다는 그 대가로 곰이 된 엄마와 분란 직전의 왕국이란 위기를 만나게 된다. 메리다는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부모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메리다의 위기 탈출에 도움을 준 이는 잘생기고 근사한 '왕자님'이 아니라 철없는 딸 때문에 곰으로 변신한 '엄마'이다. 팽팽하게 대립하던 엄마와 딸은 그 과정에서 비로소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의기투합하여 눈앞에 펼쳐진 고난을 함께 극복한다. 여러 고통 끝에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는 부모이지만, 이제 세상에는 부모의 의지대로 아이를 이끄는 것을 넘어 아이 본연의 개성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변화된 부모상이 필요하다.

위기의 모녀관계 회복을 넘어, 이 시대 자라나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이를 대하는 부모의 역할 변화를 유쾌하게 스케치한 <메리다와 마법의 숲>. 엄마와 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엄마와 아들 혹은 아빠와 아들, 아빠와 딸이 함께 본다 해도 손색없는 웰메이드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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