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진보당 내 진보정치혁신모임에서 27일 오후 1시에 연 긴급토론회의 모습. ⓒ연합뉴스

“요즘 어디 가서 말을 하면 자꾸 말이 꼬입니다” 심상정 의원이 인사말에서 답답함을 토로했다. 유시민 전 대표는 “잘 듣고 잘 챙겨서 길 찾는데 도움을 받도록 하겠다”고 짧은 인사말을 건넸다. ‘새로나기 특위 위원장’ 박원석 의원은 “(새로나기) 특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조언해주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조언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짜증난다 여기시는 것 같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27일 오후 1시 ‘진보정치혁신모임’에서 주최한 “진보정치의 진로를 말한다” 긴급토론회의 초반 풍경이다.

조희연 민교협 상임의장이 발제를 했고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민만기 녹색교통 공동대표, 이헌욱 변호사, 한겨레 김종철 기자가 토론을 하는 자리였다. 심상정, 유시민, 박원석, 천호선 등이 참석해 당 사정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토론회 현장은 썰렁했다. 당원들에게 온라인 생중계를 하는 인력들 말고는 기자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진지했으며, 때로 숙연했다. 그러나 토론회에 참석한 외부 인사들은 ‘분당’ 내지는 ‘파당’의 상황에 처한 통합진보당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현재 통합진보당의 상황은 이번 주 일요일인 9월 2일 중앙위원회를 끝으로 두 세력이 갈라서는 단계다. 강기갑 대표의 혁신재창당안이 상정될 예정이지만 구당권파와 울산연합에 의해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 혹은 그들의 방해에 의해 중앙위 자체가 소집이 안 될 가능성도 있다. 이에 ‘진보정치혁신모임’을 주축으로 한 혁신파들은 “어차피 부결될 중앙위였는데 열리지 않는다 하면 그것을 결별의 신호로 간주하고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럼에도 발제자와 토론자들의 제언은 이러한 현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나마 진보정당 운동에 오래 관심을 보여온 조희연 교수가 내세운 대선전략 정도가 논의해 볼만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민주노총 일각에서 논의하는 노동자-민중 독자 후보 전술과 얼마 전 진보신당에서 내세운 ‘사회연대 후보’를 통합진보당의 대선전략과 통합하여 정당과 운동을 망라하는 진보좌파 진영의 총괄적인 대선전략을 수립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조차도 이제는 기정사실화된 통합진보당의 ‘분당’ 혹은 ‘파당’을 막는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석기의 사퇴를 전제로 김재연의 의원직 지속에 동의하는 식으로 구당권파와 협상을 하고, 진보좌파 진영의 폭넓은 참여를 위해 유시민이 대선후보로 나서지 않고 백의종군한다는 전제 하에, 생태평화노동중심성을 갖는 진보좌파 제3후보를 진보정당-진보운동 연합후보로 추진하자는 제안이다. 조희연은 이 연합후보를 만드는 대선후보 경선이 김진숙 지도위원, 김상곤 교육감,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심상정 의원, 노회찬 의원, 이정희 전 의원, 녹색당 후보가 참여하는 정도의 개방성을 가지면서 제3후보 진영을 대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헌욱 변호사와 김종철 기자의 경우는 이 정도의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분당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또 정해구 교수와 민만기 대표의 경우도 “새 정당 체제를 대비해야 한다”든지 “한국판 뉴딜 연합이 필요하다”든지 하는 식으로 본인이 한국 사회에 원하는 진보정당 상을 제안하는데에 그쳤다. 평소라면 귀담아 들을 수도 있는 제안이었으나 현 상황에서 진보정치의 진로를 말하는 긴급토론회에서 나오기엔 대단히 한가한 소리였다.

그래서 발제자와 토론자의 발언이 끝나자 그 내용으로 토의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 사정을 설명하는 상황이 되었다. 천호선 대변인은 “5월 2일 진상조사위 발표 이후부터 지금까지 1만 2천명의 당원이 탈당했다. 당 대표 선거 당시 당권자가 5만 9천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수치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당원들이며, 이들 중 45% 정도는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 새로 들어왔던 시민당원들이다. 당원의 구성 자체가 내부 혁신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는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직전 분당을 선동하던 조승수 등이 하던 말과 매우 흡사하다. 실제로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은 “탈당까지 나서는 당원은 매우 적극적인 성향이다. 열심히 활동하거나 적어도 당대표 선거에 표를 행사하는 이들이 탈당계도 먼저 낸다”며 “그런 이들이 나가고 민노당적에서 승계된 당원 정체성이 별로 없는 이들이 남아 있는게 현실”이라고 푸념한다.

유시민 전 대표는 “진상조사위 발표 때부터 많은 생각을 했다. 이 당이 이대로 존재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더 도움이 되느냐, 아니면 다른 방향을 찾아야 하느냐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했다”면서 “내린 결론은 어떤 상황도 이대로 가는 것보단 덜 나쁠 것 같다는 것이다. 지금의 심정 역시 그와 흡사하다”고 설명했다. 유시민 전 대표는 “진보진영 사람들이 무시를 받는데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과소평가를 받는 것이냐, 아니면 정말로 우리 실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냐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꼬집으면서, “진보진영 사람들이 하는 토론회를 갈 경우 ‘우리가 이거보다는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가 실제로 이것 밖에 역량이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비판했다.

조희연 교수는 당내 인사들의 답변을 듣고 “보수진영이 90년 3당합당 후 내부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DJ에게 정권을 넘겼던 것처럼, (통합진보당을 탄생시킨 통합이) 보수세력에 빌미를 주어 정권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다”면서 현 상황의 난국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조희연 교수는 “난국을 돌파하는 우회전략으로, 민주노총과 함께 후보들을 엮어보는 방안을 생각해 봐야 한다”면서 “대선 과정에선 대중운동의 역동성을 수혈받고, 대선 이후 재창당을 하는 방향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의 방안은 여전히 구당권파와의 타협을 전제로 한다. 조희연은 “운동하는 이들 중 반미자주파들이 80 정도를 점한다면, 지식담론에선 그들이 10 정도 밖에 안 될 만큼 소수인데, 지금껏 사고방식대로 ‘고난의 행군’으로 버티고 ‘투쟁 현장에 결합’하면서 운동의 정당성을 추인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반미자주파들은 지식담론에선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제는 ‘진보정치혁신모임’에서 주최한 이 토론회엔 그의 경고를 들어야 할 이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통합진보당 혁신파들은 ‘나갔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가지 않으면 함께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통합진보당엔 87년 이후 20년 넘게 축적된 노동운동․시민사회운동․좌파담론의 역량의 대다수가 응집되어 있다. 대중적 진보정당 운동 노선으로 나아갔던 민주노동당 경험 15년도 응집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참여계로 대변될 수 있는 2천년 이후 형성된 네티즌 정치참여 10년의 역량까지 포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량들이 모여 결집한 ‘그들이 만들 수 있었단 가장 큰 배’는 불쏘시개가 되어 화려한 불꽃놀이로 세상에 존재감을 알린 후 더 이상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상황에서 패잔병의 역량이라도 결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구명정이 몇 개나 남아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 실정이다.

그런 시국에 열린 토론회에서 진보좌파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늘어 놓은 허망한 제언들은, 진보좌파의 지식담론이 진보정당 운동이나 노동조합 운동에 제언을 할 만큼 사회문제에 대해 충분한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적이 없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통합진보당의 오늘을 만들어낸 이유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못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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