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의 박태환, 유도의 조준호에 이어, 펜싱의 신아람까지 ‘오심’의 희생양이 되면서 ‘대한민국’이 들끓는다. 황당한 상황에서 털썩 주저앉은 신아람의 눈물만큼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는 것이 없다. 분출하는 분노 속에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괴롭혔던 ‘역대급 오심’들이 모두 소환된다. 두 번 죽은 주자를 살았다 판정해 승부를 반전시킨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미국과의 야구 준결승전,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때의 저 유명한 김동성의 금메달 강탈 사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양태영 오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핸드볼 대표팀 4강전의 ‘가짜’ 버저비터 오심 등이 거론된다.

▲ '억겁의 1초'가 지나간 이후 이해할 수 없는 판정에 눈물 흘리는 신아람 선수 ⓒ연합뉴스
오심의 역사와 약소국의 설움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에겐 자동적으로 ‘약소국의 설움’이라는 서사가 발동된다. 식민지배, 분단, 전쟁 및 대립으로 점철된 20세기를 통해 한국인들은 ‘국가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라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와 “나라가 더 강해져야 이런 일이 안 생기지 않겠냐?”란 논리는 내부의 불만과 갈등을 억누르는 효과적인 기제였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원리원칙을 따지기 전에 국가 간의 힘을 가늠하는 습관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습관이 지나치게 발동되면 다소 이해하기 힘든 ‘서사’를 짜놓고 이것을 다같이 받아들이는 이상한 장면이 벌어지곤 한다. 가령 1일 자 한국일보 1면 기사가 짜놓은 프레임이 그렇다. 기사 내용의 일부분을 보도록 하자.

▲ 1일자 한국일보 1면 기사.

하지만 국제스포츠계에서 한국에 대한 견제는 사실 '불편한 진실'이다. 양궁과 태권도가 좋은 예다. 양궁은 한국이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독식하자 국제연맹에서 4차례나 룰을 바꿨을 정도고, 태권도는 한국어를 보조 언어로 격하시킨 것은 물론 세계연맹 사무총장직까지 외국인에게 내놔야 했다.

경희대 이정학 교수는 "스포츠 룰 대부분은 서양이 만들었다. 그만큼 주인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최근 경제위기로 자신들은 점점 위축되고 있는데 한국이 너무 치고 나오자 견제와 질시하는 분위기도 있다"라며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스포츠 외교 분야의 인맥을 쌓아야 그나마 불이익을 줄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선수단 고위 관계자도 "앞으로 국제대회에서 더 이상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물론 종목별 국제연맹의 집행부에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전혀 별도의 사안을 하나의 해석 속으로 버무린다. 양궁의 사례와 태권도의 사례는 전혀 다르다. 양궁의 사례는 한국이 메달을 독식하면서 나온 ‘견제’의 양상이며, 태권도의 사례는 이 스포츠가 세계화되면서 나온 어떤 ‘중심이동’이다. 저 ‘견제’는 독식하는 국가가 한국이 아니라도 있을 법했던 일이다. 또 저 ‘중심이동’의 정책적 타당성에 대한 판단은 가능하겠으나, 저 서술은 기본적으로 ‘태권도는 우리 것’이란 인식에 기초해 있다. 태권도의 언어와 룰을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함을 분개하면서 “스포츠 룰 대부분은 서양이 만들었다. 그만큼 주인이라는 생각이 강하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다. 또 한국이 스포츠 강국이 된 지도 줄잡아 이십 년이 넘어 가는데, 이제 와서 집중견제를 받고 있다고 해석하는 건 너무 제 밭에 물대기가 아닌가?

결국 오심은 상황별로 다르다

오심은 심판 판정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심은 단순한 실수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편견이나 의도를 깔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언제나 ‘국력을 키우자!’가 해답이 될 수 있는 걸까?

가령 축구경기를 할 때 관객은 심정적으로 약팀을 편들지만 심판들은 심리적으로 강팀에게 기운다. 이런 건 ‘편견’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2002년 이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도전사에서도 억울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한국인들은 잘 지각하지 못하지만 아시안컵이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팀이 상대 팀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아시안컵이나 아시안게임 레벨에선 한국 축구가 심판들에게 ‘더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에 대한 편파판정은 그래도 4강이란 성적을 한번 찍어보면서, 심판들에게 이 팀도 월드컵의 주연이 될 수 있단 사실을 각인시키면서 나아지는 추세다. 2006년 스위스전의 사례는 우리는 ‘명백한 오심’이라 보지만 실은 애매한 경우다. 다른 많은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2002년 한국 대 스페인전의 사례를 ‘명백한 오심’으로 본다.

이번 올림픽의 오심들을 봐도 상황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박태환은 지금껏 축적되어온 ‘오심 대응 매뉴얼’에 따른 신속한 대응으로 판정을 번복받을 수 있었다. 전담코치 마이클 볼은 박태환의 스타트 장면에 대한 폭넓은 영상을 이미 자료화면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심판들 중 누군가는 박태환의 출발시 습관을 ‘부정’으로 인지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상황 역시 예선이 아니라 결선 상황이었다면, 남에게 줬던 메달을 박태환에게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번복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심판위원장이 심판들의 판정을 뒤엎은 조준호의 상황은 유도선수들에겐 생소하지만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이 국제유도연맹 회장을 지낼 때 만들어진 룰에 입각한 것이라 한다. 심판들의 수준이 제각각이라 그런 룰을 만들었다는 것이 박용성 회장의 설명이다. 가장 최악의 오심이었던 신아람 사건의 경우 유럽의 텃세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타임키퍼의 단순실수를 교정할 규정이 미비했다는 사실에 원인이 있다.

▲ 인구 12억 세계경제규모 2위인 '대국 사람'으로 태어나도 이런 광경을 보며 열받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일이다. 태극기 아래에 있는 것은 오성홍기가 아니라 중국인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그 중국인의 마음에서 벗어나면 되는 일이 아닐까. ⓒ연합뉴스

이렇게 상황이 제각각인데 일률적으로 “국력이 강해져야 한다”라고 반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우리가 미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정도 쯤 된다면 이런 상황을 덜 겪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덜’이다. 이 나라들은 또 자기들끼리 서로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국의 국력이 아무리 강해져 봤자 현실적으로 이 나라들에 육박하기는 어렵다. 그저 그에 버금갈 수 있을 뿐이고, 주요 강대국 외 200여개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별로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또 종목마다 상황은 조금씩 달라서, 앞서도 말했듯 가령 축구의 경우 국력이 별로 강하지도 않은 남미인들이 미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러시아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편파판정의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하필 한국에 대해서만 견제나 질시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자뻑이고, 한국만이 약해서 이런 일을 당한다 믿는다면 사실관계가 어긋난 자학이다.

한국이 스포츠나 스포츠 외교가 매우 약한 나라라면 더 잘하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쌓아야 하고 인맥을 쌓아야 한다는 조언이 실용적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메달수를 어떻게 계산하더라도 올림픽에서 20위 안에는 충분히 들어가는 나라인데다 스포츠 인맥도 꽤 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심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오심의 특성상 잘 번복되지도 않는다. 당장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이 ‘국민들’이 바라는 소리를 해주지 않는 이유도 그런 생리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애국주의 말고 보편의 논리로 접근한다면

이제는 모든 종류의 ‘오심’에서 촌스러운 북한식 강성대국의 서사를 이끌어내는 대신,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른 대응을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사실 진보진영은 오심의 서사를 정치적으로 이용을 한 전력이 있다. ‘반미’가 운동권을 넘어 대중화되었던,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의 안톤 오노의 김동성 금메달 강탈 사건이 그것이다. 하필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안톤 오노는 한국 민족주의를 부흥시키기 위한 좋은 소재였다. 그해 김동성과 붉은 악마의 영광과 고양이 없었다면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이 오심으로 얼룩진 최악의 올림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이후 고양된 미국 애국주의를 올림픽을 통해 더 분출하고 확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이 대회 개막식은 뉴욕 경찰과 소방수들이 9.11 테러 현장에서 발견한 찢어진 성조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대회가 끝날 때까지 미국에 대한 편파판정이 난무했다. 서구 언론들이 나치스의 선전도구가 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비유할 정도였다. 상황이 그렇다면, 우리가 ‘미국’같은 초강대국이 될 수 없을 때, 또 솔트레이크 때의 미국처럼 국민을 도취시키는 것이 긍정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때, 애국주의의 결과물일 수 있는 오심을 애국주의적으로 소비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밑도 끝도 없이 분노하며 ‘더 강한 나라를 만들자’고 다짐하는 것보다는, 미비한 룰과 장비를 구체적으로 보완하자 제의하고 다른 나라들과 연대하는 것이 차후의 오심을 막는 더 효과적인 방책으로 보이니 말이다.

▲ '헐리웃 액션'이 얄밉긴 했지만 안톤 오노가 그해의 솔트레이크 시티를 눈쌀 지푸리는 곳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2010년, 8년만에 조우하여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김동성과 안톤 오노의 모습 ⓒ연합뉴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