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창씨개명까지 하면서 더 완벽한 이중생활을 연기하려는 이강토지만 그래서 슬퍼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어릴 때의 첫 사랑 목단이를 대할 때만은 지난 잘못이 뼈저리게 아프다. 지금의 변화된 자신을 밝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렇지만 온가족의 원수 키쇼카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 벙어리 냉가슴도 이런 답답함보다는 덜할지 모를 일이다.

그나마 덜 보면 아픔도 그만큼 줄겠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슌지는 목단이의 서커스단을 24시간 감시하라며 고등계형사의 본업에서 이강토를 제외시켜 버린다. 강토로서는 목단이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또한 매 순간 가슴이 베일 듯한 아픔이다. 여전히 고등계형사 이강토로 보는 목단이의 날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럽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고생하는 목단이가 안쓰러워 엉뚱한 핑계를 대며 일을 돕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직 강토는 목단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비록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친일과 부일의 길을 택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면죄부를 받을 이유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각시탈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사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독립투사를 잡아들였던 제국경찰의 죄를 씻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여전히 강토는 더 괴로워야 하고, 그 고통을 통해서 나라를 빼앗긴 청년의 올바른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바로 그 계기를 마련해준 것도 목단이었다. 강토가 각시탈이 된 줄은 꿈에도 모르는 목단의 아버지는 경찰서 무기고를 털어 합방기념식장을 초토화시킬 계획을 가져왔고, 그 작전에 각시탈의 도움이 너무도 절실했다. 그래서 각시탈이 목단의 홍반장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소개를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고이소를 비롯한 고등계 경찰이 철저하게 감시하는 상황이라 각시탈을 만나러 갈 길이 봉쇄된 것이 큰 문제였다.

그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렸다. 자기 아버지를 체포한 일로 앙심을 품은 슌지가 강토를 각시탈 체포 작전에서 제외시키고 극동서커스단 감시로 빼버린 탓에 목단은 각시탈과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목단의 얘기를 들은 강토는 고민한다. 아직은 복수를 위한 마음만 있을 뿐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의식을 갖추지 못한 강토에게 독립군을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에 자신이 체포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고민한다. 아니 그 제안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돌아보게 된다.

또한 둘도 없는 친구였던 슌지가 형을 잃은 후 휴머니스트에서 제국주의 일본인의 본색으로 돌아간 것이 강토에게는 마지막 부담을 끊어낼 수 있는 조건이 됐다. 슌지와의 불안한 우정은 내선일체하는 허망한 구호나 마찬가지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슌지가 강토를 업무에서 제외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목단과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것도 아이러니하게 강토의 각성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슌지에게 강토는 언제까지나 일본에 충성스러운 반도인이어야 한다.

강토가 각시탈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저 복수를 위한 변신일 뿐이었다. 항일도 저항도 아닌 껍데기 각시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강토를 일본에 저항하는 독립투사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는 사람은 목단과 슌지였고, 이 둘은 강토에게 아주 오래 걸릴 일을 순식간에 경험케 한 기적을 가져다 준 것과 다름없다. 단순한 복수에서 항일독립투쟁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목단이고, 일본에 대한 마지막 끈이었던 슌지와의 우정을 버릴 수 있게 해준 것 역시 슌지 본인이기 때문이다. 목단을 통해 독립투사 담사리와 만나고, 슌지를 버림으로써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강토는 비로소 진짜 각시탈의 자격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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