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괜찮은 사람이어서, 그래서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좀 알려졌으면 하고 지켜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순간 이해불가 ‘화성인’ 정치인처럼 알려져버렸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이 의원은 지금 알려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주의자도 아닐 뿐 더러, 늘 현장에 머무르며 노동자 민중의 삶을 걱정하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노동자 민중의 삶을 택해 걸어왔던, 꽤 진정성 있는 진보운동가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이상규

저는 이상규 의원을 약 6년 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제가 이 의원을 좋아했던 건, 그는 언제 어디서나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고, 민주노동당 내에서 중요한 직책인 서울시당 위원장이면서도 그냥 ‘동네 아저씨’처럼 늘 서민적이었고, 또 늘 투쟁의 현장에서 발을 빼지 않던 그런 이였기 때문입니다.

▲ 5월22일 <100분 토론>에서 한 시민 논객은 이상규 의원을 향해 '북한 3대 세습, 북한 핵개발 그리고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으나 이 의원은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대답을 유예했다.

그는 자리 욕심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관악을 선거구에서 어쩌다 불미스런 일이 생겼고 그래서 이상규 후보가 대타로 뛰어 들어 당선되긴 했지만 그는 ‘국회의원 한 자리 챙겨보자’는 생각으로 대타로 나선 게 아님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상규 의원은 자리에 욕심내거나 하는 그런 속물 정치인은 절대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상규는 그렇습니다.

이상규 의원은 지금 종북주의자로도 의심받고 있습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들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기로 그는 종북주의자가 아닙니다. 경기동부 정파로 분류되지도 않습니다. 그는 서울 구로동에서 민중운동을 오랫동안 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서울연합 정파에 가깝겠습니다. 그는 통일운동보다 노동자 운동에 더 헌신해 왔으니 또 따져보면 평등파(피디계열)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100분 토론>에 나오더니 갑자기 화성인이 되어버린 겁니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청중의 질문에 대답을 거부하더니 ‘북한의 술이 어쩌고 저쩌고’ 엉뚱한 말만 해버리는 통에 저런 이미지를 갖게 됐습니다.

이상규 “북한에 대한 입장 좀 더 솔직하게 말하겠다”

지난 6일 저녁 이상규 의원을 만났습니다. ‘기자 대 정치인으로 만나면 부담스러울테니 그냥 인간적으로 만나 술 한잔 하자’고 전화 했습니다. 바쁜 의원님이 되셨지만, 그는 여전히 갑자기 전화해서 ‘보고 싶어요’ 말하면 쪼르르 술 사주러 나와주는 동네 아저씨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허름한 족발집 테이블에 막걸리 몇 병을 놓고 마주 앉았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하셨어요?”

만나자마자 <100분 토론>에서 그렇게 황당하게 대답한 이유부터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하셨어요? 그냥 솔직하게 말 하시지. 진중권 교수가 당권파의 억울할 만한 사정은 고려 안하고 무작정 몰아세우기만한 것도 문제지만 ‘정치인은 유권자의 사상검증에 임해야 한다’는 그 주장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나도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정치인은 물론 검증받아야 하지만 그 상황과 맥락이란 게 있는 건데. 그 상황에서의 정치인 검증은 악의적으로 보였고. 또 내가 북한에 대한 입장을 얘기하더라도 ‘저건 진심이 아닐거야’ 계속 공격할 게 뻔했고...”

이상규 의원에게 진심으로 조언해줬습니다.

“그냥 다음부터는 솔직하게 말 하는 게 어때요. 사상검증에 반대하다는 것을 전제로 밝히고 나의 북한에 대한 입장은 이러 이렇다 하고 말이죠.”

이상규 의원은 “이제 어느 정도 내 생각은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들으셨겠지만 이제 이 의원은 “북한의 3대 세습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약간 논쟁이 오갔습니다.

“이석기와 김재연은 사퇴를 하는 게 옳지 않나요. 왜 이상규 의원이 그분들 편에 서서 같이 욕먹는 겁니까. 굳이 안 그래도 되잖아요.”
“진상조사를 더 해서 결과를 본 다음에 결정하는 게 맞다고 봐요.”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면, 그러면 그 분들이 사퇴할까요. 만약 당권파가 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일으킨 게 아닌 것으로 나온다면? 그러면 이 모든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안져도 되는 건가요?”

이상규 의원과 저와의 생각은 여기서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토론이 5분여 더 오갔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 나눈 대화이기에 구체적으로 오간 이야기를 모두 옮겨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저는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제발 국민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결정해 달라” 당부했고, 이 의원은 “참 어려운 문제다”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며 웃었습니다.

지난 한 달여간 통합진보당 사태를 놓고 트위터 상에서 저는 참 많은 분들과 논쟁을 해야 했습니다.

“경선 진상조사 결과에도 뭔가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고, 당권파가 부정선거를 조직적으로 벌였다는 증거는 없으니 좀 신중하게 바라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고, “당권파가 전국 운영위 폭력사태에 책임을 지고 의원직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당권파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몇몇 아끼던 트위터 친구들은 저와의 친분을 청산하고 ‘언팔’을 선언해버리기도 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그 속에 복잡한 실타래가 엉켜 있습니다. 그래서 무자르듯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문제를 트위터 140자 몇자로 표현했으니 많은 분들이 제게 큰 항의를 할만 하지요. 다 제 실수입니다. 제가 감당해야지요.

부정선거보다는 조직투표

그래도 이 자리를 빌어 통합진보당 사태에 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당권파 전체를 부정선거 세력으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권파 지도부가 부정선거를 일으키려고 조직적으로 뭔가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현재의 진상조사위 발표에는 부족합니다. 일부 당원들이 부정선거를 했고, 공교롭게도 부실하게 선거가 관리 된 것은 틀림없긴 하나, 이것은 당권파만의 책임은 아닌 것이죠. 통합진보당 전체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물론, 통합진보당에 가입한지 얼마 안된 이석기씨가 갑자기 당원 투표 1위를 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던 김재연씨가 청년 비례대표에서 압도적 1위를 한 것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결과를 두고 당권파가 부정선거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부정투표가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순 있더라도 좀 더 근본적으로는 조직투표(혹은 정파 세팅 선거)가 벌어졌다고 표현하는 게 좋겠습니다.

조직투표는 부정선거가 아니냐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거에서든 자신의 정파를 많이 당선시키려 하는 조직투표가 벌어져요. 정당에서든,시민단체에서든,동창회에서든,작은 계모임에서든 어디서든 다 이런 일은 벌어집니다. 자기 친구들 또는 얼굴이라도 한번 봤던 사람들에게 ‘야, 내가 이런 사람 좋아하는데 웬만하면 좀 밀어줘’ 이렇게 선거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당권파들이 ‘우리는 이석기와 김재연이 좋으니까 이 사람들을 밀어주자’ 약속한 게 나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비당권파들이 ‘우리는 OOO이 좋으니까 OOO을 밀어주자’ 운동했다면 그것 역시 나쁜 게 아닙니다.

조직투표 자체를 나쁘게 봐서는 안돼요. 경기동부 정파들이 자신의 정파를 꼭꼭 숨긴 채 마치 당 내에 아무런 정파가 없는 것처럼 눈속임하는 것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경기동부 정파가 조직투표를 한 것 자체를 나무랄 순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정말 순수하게 자율 투표 했는데 이석기와 김재연이 당선된 거예요’ 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만 나무라면 되는 겁니다.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제입니다. 당비를 내고 당권을 가진 사람들이 당의 주체가 되어 당원들의 투표를 통해 국회의원 후보를 뽑아요.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처럼 당 지도부가 몇명 찍어서 국회의원 후보 공천 주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통합진보당은 이번 부정경선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당보다 훨씬 민주적 정당체계를 갖춘 겁니다.

통합진보당 내에는 경기동부 정파가 최대 파벌이에요. 이들이 당에 열심히 가입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통합진보당을 방치하고 외부에서 그냥 구경만 할 때 이들은 당에 열심히 가입한 거예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통합진보당은 진성당원제입니다. 그러면 당의 주인은 누가 되겠습니까. 어떤 정파의 국회의원 후보가 많이 나오겠습니까. 당연히 경기동부 정파인 거예요. 이건 경기동부가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일으켰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냥 그 파벌의 당원 수가 제일 많기 때문에 벌어지는 당연한 결과예요. 하지만 언론은 무조건 부정선거로만 몰아갑니다. 이건 둘중 하나만 얘기하는 거예요. 시민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줘야 합니다.

억울해도 정치적 책임을 져야 그것이 진보

그렇다면 제가 왜 당권파 비례대표 당선자들에게 사퇴를 요구한 것이냐고요.

정치적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당권파가 부정선거 일으킨 주체라서가 아니라,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이 총체적으로 부실했으니까, 그래서 선거 자체가 무효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당원들의 대표인 전국 운영위원들이 그렇게 모두 비례대표 당선자들 총사퇴 하라고 결정했으니 그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자들의 태도라는 겁니다. 당권파 당선자들만 사퇴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모두 같이 사퇴하고 국민 앞에 머리 숙이고 용서 빌자는 거잖아요.

게다가 폭력사태까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이 폭력사태를 이석기와 김재연씨가 사주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엄연히 당의 최고 의사결정체인 기구가 민주적으로 정한 결정에 당권파가 따르지 않아서 벌어진 불상사인 것은 사실 아닙니까.

기자로서 보기에도 당권파 비례대표 당선자들이 억울해 할 만 합니다. ‘내가 부정선거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책임을 지라는 것인지’ 억울할 겁니다. ‘비당권파 세력들이 당권을 쥐기 위해 음모를 벌인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모를 일이죠.

하지만 ‘진보의 정치’는 자리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선배 진보 운동가들이 어떻게 활동해왔습니까. 나보다는 아끼는 동지를, 사사로운 인간관계보다는 민주화 대의를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헌신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희생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민주화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온 것 아닙니까. 야권연대도 바로 그 희생을 통해 가능했던 것입니다. 민주당에 희생을 요구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장은 억울할 수 있더라도 전체 진보진영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게 진보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석기와 김재연씨가 사퇴하지 않으면서 전체 진보진영이 함께 몰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쓸 데 없이 종북논란에까지 휘말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이 아름답게 퇴장해주면 진보진영은 다시 전열을 정비해 ‘민생 민주 개혁’ 국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게 진보 운동 아닐까요. 의원직 사퇴한다고 해서 몇 개의 의석이 새누리당으로 건너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당권파의 의석은 비록 아니겠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뛸 또 다른 통합진보당의 대표들에게 의석이 돌아가는 것인데, 까짓 거 의석 몇 개 양보하는 게 뭐 그리 어렵습니까. 평범한 국민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기를

이상규 의원은 분명 좋은 국회의원이 될 겁니다. 그런 믿음 자체를 버리진 않습니다. 그는 ‘제2의 이정희’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첫발을 잘못 내딛었습니다. 특정 정파들 간의 경쟁, 보이지 않는 감정 대립, 이런 것들에 집중하면서 좀 더 넓은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뭇잎 바라보느라 숲을 못보고 있습니다. 그게 안타깝습니다. 이 의원이 한 발 짝 멀리 떨어져서 이번 사태를 조망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진보정당을 사랑하는 국민의 바람이 무엇인지 금방 보이고, 답은 분명해질 겁니다. 경기동부를 설득해주십시오.

벌써 19대 국회의 시계는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서 내부 문제를 정리하고 이명박 정권의 부정부패를 날카롭게 감시하길 바라는 국민의 요구에 통합진보당이 부응하기 바랍니다.

현재 한겨레 디지털뉴스부 기획취재팀에서 취재를 하고 있는 기자다. 영상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함께 들고 현장을 누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앞선 멀티형 기자가 되려고 노력중이다.

우리 사회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사명을 놓는 그 순간, 기자가 아닌 단순 직장인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 그저 그런 기자가 되느니 문제적 기자가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 살기도 한다. 한겨레와 한겨레 독자들을 무지 사랑한다.

개인 블로그 http://blog.hani.co.kr/catalu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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