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각시탈, 지금 방송되고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20대 시민)

"아이의 아빠가 죽었지만 KBS는 사과 한 마디 안합니다. 제발 각시탈을 보지 말아주세요."(각시탈 보조출연자 故 박희석씨 아내 윤아무개씨)

▲ 6월 1일 정오,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서 침묵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고 박희석씨 부인 윤아무개씨. ⓒ곽상아

뙤약볕이 내리쬐는 6월 1일 정오, 서울 여의도 KBS 신관 앞에 한 모녀가 피켓을 들고 나타났다. 4월 18일 경남 합천에서 KBS <각시탈> 보조출연자를 단체로 태운 버스가 전복되면서 숨진 보조출연자 고 박희석씨의 가족들이다. 모녀는 지난달 22일부터 KBS 앞에서 침묵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같은날 포털사이트에 넘쳐나는 <각시탈, 수목극 시청률 1위> <수목극 1위 '각시탈' 치명적 매력 '베스트 신 3'> <'각시탈' 신현준, 바보와 영웅 오가는 '반전연기' 호평> 등의 기사와는 선명히 대조되는 풍경이다.

모녀가 매일 KBS 앞을 찾아오는 이유는 <각시탈>의 방영 주체인 KBS와 외주제작사 팬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보조출연업체 태양기획 등이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KBS와 외주사인 팬엔터테인먼트는 입장을 내어 "깊은 위로와 함께 사태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 장례와 치료 및 보상 등이 원만하고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KBS) "향후 조치에 사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팬엔터테인먼트)라고 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신속하게 대응했으나 4월 19일 "KBS, 팬엔터테인먼트, 태양기획, 동백관광 등 4개사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장례를 지원하겠다"며 장례비용으로 2천만원을 준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공식 발표 외에 유족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넨적도 없다. 특히, 유족은 KBS가 지난달 18일 발표한 '보조출연자 사고에 대한 KBS의 입장'에 분노했다.

"'깊은 위로와 함께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한 것 외에 도대체 KBS가 실제로 한 게 무엇입니까? 그 입장은 '대국민 사기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용역을 거쳤다고 하지만 KBS의 이름으로 각시탈이 방영되고 있지 않나요? 당연히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고 박희석씨의 딸도 엄마를 따라 지난달 22일부터 KBS 앞 침묵시위를 해오고 있다. ⓒ곽상아

모녀가 시위에 돌입하자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시위에 돌입한 지난달 22일 KBS, 팬엔터테인먼트, 태양기획, 동백관광 등 이번 사건에 관련된 4개 회사에서 모녀를 찾았다. 윤씨는 "저희를 보고 '도대체 왜 시위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며 "지난달 29일에 찾아와서는 '돈 더 받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라고 하는데 기가 막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각시탈 첫 방송됐던 지난달 30일, 윤씨의 감정은 더욱 격해져 KBS 앞에서 시위를 진행한 뒤 고영탁 KBS 드라마 국장을 찾아갔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KBS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들어갔는데, 청경들이 제지하더군요. 고영탁 국장을 만나서 '당신들이 공식 입장을 내놓은 것 외에 한 게 뭐가 있느냐'고 따져물었더니 '우리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전에 KBS의 한 관계자도 섬에서 촬영하는 도중 아들이 죽었지만 1주일동안 섬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했어요. '국민과의 약속이라 각시탈은 방영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런데 저희는 국민이 아닌가요?"

▲ 5월 23일 열렸던 KBS <각시탈> 제작발표회 모습.

숨진 박씨는 지난 2월부터 보조출연업체 '이준기획'에 소속되어 출연료를 지급받아왔다. 그러나 박씨 출연료와 관련한 세금을 원청회사인 '태양기획'에서 납부하는 등 '이준기획'이 사실상 '태양기획'에 소속되어 운영돼 왔기 때문에 박씨의 진짜 고용주는 '태양기획'이라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태양기획은 "이준기획에서 출연자를 모집했고, 박씨는 이준기획에서 출연료를 받아갔다"고 하고, 이준기획은 "사실상 태양기획이 박씨를 모집했기 때문에, 태양기획이 처리해야 한다"며 서로 책임을 미루는 탓에, 유족들은 출연료 지급 관련 서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지난달 15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제기해야 했다.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은 보조출연자의 산재 신청에 대해 한 번도 곧바로 받아들인 적이 없어, 이번 산재신청의 전망도 어둡다.

2008년 11월 서울행정법원은 보조출연자 A씨가 제기한 소송에서 "촬영현장에 일용직의 형태로 고용되어 제작사나 용역공급업체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노무를 제공하고 그러한 노무제공에 대한 대가로 시간급 보수를 받는 보조출연자는 근로자로 봄이 상당하다"며 보조출연자가 '개인사업자'가 아닌 '근로자'라고 판결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국 보조출연자 노동조합의 이규석 사무국장은 "2008년 법원 판결이 있었음에도 근로복지공단은 보조출연자들의 산재신청을 단 한 번도 곧바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늘 '산재를 신청한 보조출연자가 근로자라는 근거를 가져오라'고 하기 때문에, 재판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며 "물론 앞선 판결이 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지만 시간이 꽤 걸리니까 대다수가 제풀에 지쳐서 포기한다"고 전했다.

2008년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한국노총 중앙법률원의 김형동 변호사도 "법원이 보조출연자를 이미 근로자로 인정한지 오래됐는데 행정관청들은 법원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박씨의 경우, 회사 측에서 제공한 차량을 타고 단체로 촬영지에 가다가 당한 사고이기 때문에 당연히 산재로 인정돼야 한다"며 "보조출연자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공영방송이 '이름없는 영혼의 통쾌한 액션활극'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한 드라마를 촬영하는 도중 벌어진 '사망사고'이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방송사→외주제작사→기획사→보조출연자'의 연쇄고리 속에서 계약서 한 장 없이 낮은 임금을 감내하며 묵묵히 일해야 하는 현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언제든 또다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전국 보조출연자 노동조합의 이규석 사무국장은 "근본적으로는 불합리한 방송제작 구조 관행이 문제"라며 "제작비의 40~50%를 주연급 연기자들이 가져가고 있는데, 보조출연자들은 똑같은 시간 일하고도 일당 4만원 정도를 가져갈 뿐이다. '보조출연자들에게 지금보다 10%만 더 써라'고 해도 방송사들은 들은 척도 안 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이규석 국장은 '방송사→외주제작사→기획사→보조출연자'의 고리 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슈퍼갑' 방송사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보조출연자 박씨와 KBS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은 맞지만 KBS는 현 구조에서 '슈퍼갑'으로서 관리감독하는 위치에 있지 않느냐"며 "KBS는 용역계약을 준 것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당사자가 아니라고 발뺌하지만 최종적 책임은 KBS에게 있다. 지금의 침묵은 큰 '횡포'"라는 것.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풀어가야 하는데, 사실 현 상황에서 KBS를 상대로 '보조출연자들의 근무여건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해봤자 통할지 착잡합니다. 매년 방송사들은 보조출연업체인 기획사들과 계약을 하는데 연장, 야간, 철야 수당을 (방송사 측에서) 모두 지급하도록 돼 있지만 실제로는 안 줍니다.

작년에도 저희가 기획사를 상대로 '체불임금 청구소송'을 제기했었는데 방송사와의 계약금액, 거래명세서, 법인카드로 돈 들어온 내역 등을 다 확인해보니 방송사가 안 준 게 맞더군요. 보조출연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획사를 상대로 요구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어서 이제는 방송사를 상대로 직접 싸우려고 합니다.

어차피 기획사는 방송사 앞에서 철저한 '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만약 KBS한테 사태수습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정말 큰 문제예요…."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