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남자는 참 좋은 드라마였다. 적어도 18회까지는 절대 그러했다. 그러나 적도의 남자도 마지막 화룡점정엔 실패하고 말았다. 19회까지만 해도 납치니 뭐니 급박하게 돌아가던 사건들이 마지막 회에 들어 사연 없이 정리정돈이 돼버렸다. 거기에 신파까지 침입해 문학성 높던 드라마의 퀼리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지난 두 달간 평소 하지 않던 철학적 고민까지 던져주던 드라마라고 믿어지지 않는 결말이었다. 기대가 컸고 그래서 또 행복했지만 결말에 와서는 두 달의 흥분과 설렘을 도둑맞은 심정이었다.

미리 찍어둔 결말 부분 때문이었을지는 몰라도 20회의 전개는 마치 결과에 짜 맞춰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용서란 결말에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용서가 됐든 아니면 저 처절한 복수를 하든 그 결정에는 납득할 만한 모티브가 담보되어야 공감할 수 있는 법이다.

15년 간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장일의 고통과 고독이 드러난 점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고백을 기억상실과 정신 장애라는 장치를 통해서 했어야 했는가 싶다. 또한 기억상실이 장일의 심성을 바꿔놓은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의 용서 또한 뭔가 개운치 않다. 온전한 상태에서 용서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을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런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장일이 바다로 뛰어들어 그의 생사를 독자의 몫으로 남긴 것은 나름 근사한 처리였다. 또한 바닷물 속으로 빠져드는 장일의 표정은 그나마 적도의 남자다운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었다.

그런가 하면 장일에 대한 애정과 집착으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버린 수미는 정작 장일이 기억상실에 빠져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때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는 혼자서 여유롭게 전원에서 아버지와 도란도란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장일과 달리 수미에게는 선우의 어떤 용서도 없었다. 그저 그림 몇 장 찢고 행패를 부린 것으로 15년의 많은 죗값을 다 치른 셈 치는 것인가?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18회까지 보였던 적도의 남자 특유의 색깔이 결말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시청자 대부분은 해피엔딩을 원한다. 유별난 성격이 아니라면 선한 주인공들이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적도의 남자만은 달랐다. 아니 다를 것이라고 은연중에 세뇌시켜 왔다. 그리고 시청자도 이번만은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좋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래도 19,20회를 제외한 나머지를 통해 적도의 남자는 아주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준 것은 틀림없다. 아주 오래 전 자기 여자를 의심했던 남자로 인해 파생된 긴 세월의 업보가 김선우, 이장일, 최수미 세 친구에게 전이된 불행한 스토리지만 그 풀어가는 과정에서의 이야기들은 윈도우 쇼핑 같던 드라마들과 달리 시청자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 같이 생각하고 또 고민케 했다.

그리고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 또한 적도의 남자를 잊지 못할 경험으로 만든 주역이다. 엄태웅이 이 드라마에 캐스팅된 것은 정말 다행이었으며, 이준혁, 임정은의 발견은 이 드라마의 최고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적도의 남자 이전에는 그저 선남선녀의 연기자 정도로 여겨졌던 두 배우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서 무서운 연기력까지 확인시켰다. 이들은 장일과 수미를 연기하면서 애증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했다.

이준혁과 임정은의 발견은 결말에서 실족한 적도의 남자지만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은 수확물이었다. 그런 반면 이보영의 캐릭터는 아쉬움이 크다. 장일과 수미 캐릭터에 너무 집중한 탓인지 적도의 여신 이보영은 중반 이후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다. 그나마 선우의 헤밍 씨라서 엔딩을 차지한 정도로 만족하기엔 이보영이 훨씬 좋은 배우였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긴 설렘과 짧은 실망으로 적도의 남자는 종영했다. 당장은 실망이 크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 드라마는 장기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 마지막까지 만족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도의 남자는 좋은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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