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10월 30일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플레이오프4차전 에서 8,9회를 무실점,세이브를 올린 LG이상훈이 승리가 확정되자 양손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매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더그아웃만 바꿔 펼쳐지는 어린이날 LG와 두산의 경기는 LG의 역전승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만원 관중 앞에서 9회초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며 LG의 승리를 지킨 것은 봉중근이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내용이나 결과 못지않게 봉중근의 가발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경기 전 어린이날 행사에서 봉중근은 1990년대 LG의 전성기를 이끌던 ‘야생마’ 이상훈을 연상시키는 장발 가발을 착용하고 등장하더니 경기 종료 후 장내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도 동일한 가발을 착용했습니다.

1993년 LG에 입단한 이상훈은 통산 71승 40패 98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100승도 100세이브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LG 유니폼을 입었던 것은 7시즌에 지나지 않으며 LG에서 은퇴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훈은 불세출의 마무리 투수 김용수에 버금가는 LG의 레전드로 주저 없이 꼽히곤 합니다.

‘야생마’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이상훈은 야성미 넘치는 투혼의 사나이였습니다. 데뷔 이듬해인 1994년에는 18승을 거두며 정삼흠, 김태원과 함께 선발 삼각 편대로 LG의 페넌트 레이스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의 1등 공신이 되었으며 1995년에는 20승 고지에 올랐습니다. 많은 이닝을 던질 수 없었던 이상훈은 선발에서 마무리로 전환해 1997년에는 37세이브를 거뒀습니다. 강렬한 락 음악과 함께 갈기 머리를 휘날리며 반팔 차림으로 마운드에 뛰어 오르던 이상훈의 위용을 많은 이들은 잊지 못합니다.

무한한 도전 정신을 지녀 국내 무대가 비좁았던 이상훈은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와 메이저리그 보스턴을 거친 후 2002 시즌 도중 국내에 복귀해 LG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연투에 지친 이상훈은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삼성 이승엽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한 뒤 강판되었고 이어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내줘 LG는 아쉽게 준우승의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이후 LG는 2011년까지 9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LG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가을 야구의 추억이 바로 이상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3년 이상훈은 30세이브 고지에 올랐지만 시즌 종료 후 신임 이순철 감독과의 불화로 2004년 초 SK로 트레이드되었고 그해 6월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훗날 이상훈은 LG에서 은퇴하지 않은 것에 크게 후회하며 자신이 ‘영원한 LG맨’이라는 심경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상훈은 야구계를 떠나 음악에만 전념했지만 2010년 4월 LG 트윈스 공식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쌍둥이마당’에 LG 프런트가 자신을 기만했다는 내용의 장문의 글을 직접 올렸습니다. LG의 2군 ‘구리 구장의 땅 고르는 일’이라도 하고 싶었던 이상훈은 LG 프런트가 코치직을 제안해 신변까지 정리했지만 정작 LG에서 부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을 판매용 유니폼에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했습니다. 이후 LG에서 이상훈의 이름을 다시 올리는 것은 금기시되었습니다. LG와 이상훈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 LG 공식 홈페이지에는 '이상훈 만큼 잘 하고 싶다'는 봉중근의 인터뷰가 보입니다. 봉중근으로 인해 '야생마' 이상훈의 이름이, 그간 언급이 금기시되던 LG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등장했습니다

2년이 지난 2012년 어린이날을 앞두고 봉중근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팬이 보내준 가발을 쓰고 소위 ‘배바지’ 차림으로 이상훈을 흉내 내더니 어린이날에는 그라운드에 가발을 쓰고 등장했습니다. 봉중근뿐만 아니라 4번 타자로 상한가를 올리고 있는 정성훈 또한 가발을 착용해 팬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팀 내 공식 행사인 장내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 봉중근은 물론 장내 아나운서까지 이상훈의 이름을 입에 올렸습니다. 경기 종료 후 LG 트윈스 공식홈페이지에도 숨은 MVP를 선정하며 ‘이상훈처럼 잘 하고 싶다’는 봉중근의 발언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바야흐로 ‘폐족’이었던 이상훈이 갑작스럽게 해금된 것입니다.

이상훈과 봉중근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팀을 이끈 좌완 에이스이며 승부욕에 불타오르며 강한 근성으로 무장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 팀을 우선한 희생정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메이저리그를 경험했으며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 선발 투수에서 마무리 보직을 맡게 되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봉중근은 ‘이상훈을 바라보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며 이상훈과 같은 마무리로 활약하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냈습니다. LG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상훈이 이끌었듯이 LG의 새로운 전성기를 봉중근이 이끈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이상훈의 이름이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니 LG에서도 이상훈과 ‘화해’하는 것을 검토해야 합니다. 2010년 이상훈과 마찰을 빚었던 구단 고위 인사들은 교체된 상황입니다. 화해를 위한 외형적 조건은 갖춰진 셈입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야구계를 떠나 있었던 이상훈이 당장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없다면 해외 연수를 다녀온 뒤 LG에 복귀하는 것입니다. 차선의 시나리오는 지도자가 어렵다면 구단 차원에서 영구결번이나 시구와 같은 ‘이상훈 데이’ 행사를 통해 공식적인 화해의 장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설령 평일이 ‘이상훈 데이’로 선정된다 해도 잠실야구장은 LG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완전 매진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롯데와 고 최동원처럼 제대로 화해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달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프로야구의 존립 근거는 바로 팬입니다. 팬들이 원하고 선수들이 본받고 싶어 하는 전설이 있다면 구단에서는 팬과 선수단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프로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근성의 상징이었던 이상훈을 복권시키는 것은 선수단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미칠 것입니다. 아울러 LG 암흑기의 굴곡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잠실야구장에서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이상훈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야구 평론가. 블로그 http://tomino.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MBC 청룡의 푸른 유니폼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적시타와 진루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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