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남자 13회는 통째로 런닝머신 위에 올라 제자리걸음을 한 기분이었다. 특히나 여러 차례 화제가 됐던 이준혁의 멘붕 장면은 하도 반복되어 더욱 그랬다. 모두 생략하고 옥상 위에서 태양을 바라보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과하게 반복되는 장면은 배우들 감정만 낭비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연장설에 혐의를 두게 된다.
16부로 다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면 4회가 아니라 그 이상도 나쁠 것은 없다. 그렇지만 13회를 봐서는 할 얘기가 남아서 그렇다는 믿음을 얻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렇게 산만한 와중에 아주 치명적인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보영이 그만 엄태웅의 본 모습을 알아버리게 된 것이다.
엄태웅이 부산에 가고 없는 사이 임정은이 회사로 찾아왔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엄태웅 사무실에서 뭔가를 하다가 흰 종이 몇 장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기다릴 새도 없이 엄태웅 책상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서랍에서 옛날 이보영이 선물했던 사진을 발견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책상 위에 놓인 폴더에 사진을 끼워넣는다.
이미 수미는 충분히 악녀다. 그렇지만 아무 때나 악녀인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된 목표 앞에서만 독사같은 악녀가 될 뿐이다. 그런데 이보영 사진을 폴더에 끼워 둠으로 해서 결국 엄태웅의 고통스러운 위장을 어이없게도 해제시키게 됐다. 이보영에 대한 이준혁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참 허망한 순간이었다.
물론 엄태웅 스스로 말했듯이 이보영은 15년 전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악인들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이다. 엄태웅의 인생의 반이 복수라면 나머지 반은 이보영에 대한 사랑인 것을 다 안다. 그런 전제 하에 죽을힘을 다해 이보영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멀리서 아련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겨우 견디는 모습은 지금의 엄태웅에게는 중요한 모습이다.
돌아온 엄태웅은 유일하게 금줄에게만 본 모습을 보였다. 그 외에는 전부 가면을 쓰고 대하고 있다. 이보영에게는 물론 다른 의미의 외면을 했다. 복수 이상의 복수를 계획하는 엄태웅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했다. 장일을 속이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감정을 배제한 무표정의 상태가 아니라면 복수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선 13년 전 최광춘(이재용)이 보낸 편지를 비로소 엄태웅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 죽음에 대한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으니 엄태웅에게 큰 희망이 될 수 있다. 거대한 댐도 작은 구멍 하나로 붕괴될 수 있는 것처럼 그 편지 한 장이 의외로 커다란 돌파구가 될 가능성도 열어두게 된다.
또한 진노식에 대한 공동의 원한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될 기회를 맞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그간 칭찬해마지 않았던 작가에 대해 조금은 실망이 느껴졌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