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구들과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기자 친구를 만난 김에 평소 궁금했던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중에는 강남을 선거구에서 벌어진 ‘부정선거 의혹’도 있었다. 나는 대답해주었다. “부정선거가 일어났다는 증거없어.”

그러지만 친구들은 내 말을 쉽게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이 정부에서는 그런 조작도 솔직히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는 세상이니.”라고 말할 수 밖에. 우리는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디도스 부실대응 해놓고 덮기에 급급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선관위에 대한 불신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특히 불신이 폭발한 것은 지난 해 10월26일 서울시장 선거 때 벌어진 ‘디도스 공격 사건’ 부터일 것이다.
 
시민들이 투표소를 제대로 못 찾도록 디도스 범인들과 공모해 일부러 서버를 끊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디도스 공격이 있었을 때 선관위가 어처구니 없게도 케이티(KT)회선을 차단해 선관위 누리집 접속을 더욱 어렵게 만든 실수를 자초한 것만은 사실로 밝혀졌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받을 때 KT선 끊어 접속장애 자초했다.)

그러나 선관위는 이에 대한 사과는 커녕 <나는 꼼수다>의 문제제기에 대해 오히려 기자들에게 불만만 털어놓고 ‘엘지 앤시스’ 쪽에는 언론 플레이를 요청했다. 
 

▲ 투표함 사진

공직선거법을 스스로 위반한 선관위

4.11총선 때 벌어진 강남을 사건은 선관위의 신뢰를 더욱 땅에 떨어트렸다. 정동영 후보 쪽이 문제제기한 18개의 투표함 중 5개의 투표함이 봉인·봉함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선관위 자체 조사 결과 밝혀졌다. 나머지 13개의 투표함에 대해선 투표함 상자 밑에 테이프를 잘 안 붙이는 등 역시 경미한 실수가 벌어졌다. 엄밀하게 말하면 18개 투표함 모두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5개의 투표함에선 심각한 문제가 벌어졌다. 대치2동3투표소, 대치2동8투표소, 일원2동5투표소 ,세곡동1투표소의 투표함은 투표구 구멍이 봉인·봉함되지 않았다. 대치2동7투표소는 자물쇠가 풀린 채로 개표소에서 발견됐다.
 
선관위는 투표구 구멍을 봉함하지 않아도 투표함 겉 뚜껑을 닫으면 봉함된다고 밝혔지만 어쨌건 공직선거법 168조(투표함의 투입구와 그 자물쇠를 봉쇄·봉인하여야 한다) 위반이다. 또 ‘1회용 허술한 자물쇠여서 쉽게 파손된다’는 게 선관위의 해명이지만 애시당초 그런 자물쇠를 사용해 온 선관위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사과했다는 선관위 발표문 보니…

이렇게 문제가 큰데 선관위는 지금까지 어떤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16일 서울시 선관위에 전화해 왜 사과하지 않는지 물었다. 선관위 관계자는 “사과했으니 선관위 누리집을 가보라”고 말했다. 언제 사과를 했다는 건지? 금시초문이라 바로 선관위 누리집을 가서 이것 저것 살펴보았다.
 
보도자료가 하나 떠 있었다. 클릭해 열어보니 사과 비슷한 내용이 있기는 했다. 26줄 짜리 발표문이었다. 첫째 줄은 ‘유감 표명’이었다. “강남구 선거 관리위원회는 투표함 중 일부의 투표지 투입구 등에 봉쇄·봉인이 누락되어 개표소에서 개표참관인의 이의가 제기됨에 따라 개표가 지연된 점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24줄은 온갖 변명과 해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디서도 진심어린 사과는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선관위는 사과 계획이 없다.
 
부정선거 증거는 없지만…

물론, 이번 ‘구룡마을 투표함 바꿔치기’ 의혹은 증거가 없다. 내가 직접 취재를 해봐도 증거가 안 나왔다.
 
구룡마을 투표소에서 개표장까지 직접 이송차량을 운전한 사람과 통화를 해봤지만 그는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운전자는 구룡마을 주민이었다. 정동영 후보 쪽 투표참관인이 애초 “내가 본 것과 다른 투표함이다”고 말했던 것도 사진만 보고 잘못 증언한 것으로 보인다. 정 후보 쪽 참관인은 13일 선관위에 출석해 투표함을 자세히 살펴 본 뒤 “내가 본 것과 일치한다”고 진술했다. 다만, 투표관리관인 강남구청 공무원이 투표함 관리 매뉴얼에 나온 사진대로 투표함을 봉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강남을 51개 투표소의 투표참관인 중 단 한명을 빼고 모두 집에 돌려보낸 것도 선거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공직선거법 170조는 “투표함 송부 때 투표참관인 1인과 경찰공무원을 동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 투표참관인의 동반을 의무화하고 있지 않다. 구룡마을 투표참관인 2명은 투표관리관이 돌려보낸 게 아니라 투표참관인들이 “집으로 가겠다”고 밝혀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을 살펴보아도 선관위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11일 저녁 선관위 관계자의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에서 사태가 커졌다. 개표참관인이 투표함의 봉인·봉쇄를 문제 삼자 강남구 선관위 관계자는 “문제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개표를 강행해 버렸다. 오히려 문제 삼는 개표 참관인을 윽박지르며 “우리가 설마 부정선거를 하겠냐”는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문제제기 됐던 구룡마을 투표함을 그냥 열어버렸다.
 
애초에 문제제기 하는 개표참관인에게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고 납득할만한 조치를 취했다면 사태는 여기까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관위가 잘못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 해명을 했다면 사태는 여기까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 둘 모두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오로지 변명과 “선거결과에 흠집 내는 주장을 자제해 달라”는 요구뿐이었다.
 
며칠간 트위터를 뒤덮는 누리꾼의 분노를 보면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갖가지 억측들이 난무했다. 내가 “부정선거라는 증거는 없다”고 얘기해도 상당수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누리꾼을 탓할 순 없었다. 선관위 스스로 자초해 불신의 늪에 빠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음모론은 무성의한 해명과 변명에서 비롯한다. 선관위는 즉각 국민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문책해야 한다.
 
-덧붙임

투표함이 기존의 알루미늄 재질에서 본격적으로 종이재질로 바뀐 것은 2007년 대선 때부터이다. 선관위는 기존 투표함이 부피를 너무 차지해 관리에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종이상자 투표함도 바닥을 이중으로 메우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선거 때 투표함 봉인·봉쇄를 이렇게 허술하게 하는 상황이라면 종이 재질 사용은 재고해 보는 게 좋겠다.

현재 한겨레 디지털뉴스부 기획취재팀에서 취재를 하고 있는 기자다. 영상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함께 들고 현장을 누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앞선 멀티형 기자가 되려고 노력중이다.

우리 사회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사명을 놓는 그 순간, 기자가 아닌 단순 직장인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 그저 그런 기자가 되느니 문제적 기자가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 살기도 한다. 한겨레와 한겨레 독자들을 무지 사랑한다.

개인 블로그 http://blog.hani.co.kr/catalu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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