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남자가 멜로로 길을 잡자 늦게 배운 도둑질처럼 무섭게 진도를 나갔다. 해당화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지원은 선우에게 먼저 다가가 키스를 선물했다. 앞자리의 남자는 지는 석양을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 한적한 버스 안의 몰래 키스는 뭔가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느낌을 주었다.

서로 경험이 없는 이 커플의 키스는 그냥 입맞춤이었다. 하는 쪽도 받는 쪽도 그저 그 상황이 놀랍기만 해 입술이 닿은 그 상태에서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차렷 키스였다. 세련되지 못한 이 습작의 키스는 나중에 완성될 것이기에 어설픔 그대로 좋았다.

모름지기 새 입술들끼리의 입맞춤은 겨우 이 정도가 정답이다. 아무리 영화를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쳤다고 한들 정작 실전은 하도 달라서 이 이상 하면 초짜가 아닌 법이다. 그런 풋풋함이 소설 같은 이 사람들의 그림에서 벗어나지 않은 적당한 절제였다. 또 그래서 더 설레고 흐뭇하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른 키스가 있었다. 이건 진짜 깊은 키스였다. 그런데 설렘이나 기다림 끝의 자연스러운 키스가 아니라 경멸과 집착의 키스다. 장일은 이미 지원에게 거절당했고, 끝내 못나게도 선우에게 지원을 포기하라는 억지를 부리다가 호되게 두들겨 맞고 돌아왔다. 이래저래 모양 사나워진 장일은 혼자서 독한 양주를 마시는데 마침 수미가 두고 간 옷을 찾으러 왔다.

▲ 적도의 남자는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서정적 풍경이 인상적이다
가뜩이나 심사가 뒤틀려 있는 장일은 수미에게 모진 말을 뱉어낸다. “제발 내 앞에서 꺼져”라는 말까지 한다. 대단한 모멸이다. 아무리 해바라기 사랑이라 하더라도 기분 좋을 리 없는 수미는 “나한테 함부로 하면 안 돼”라며 발끈한다. 그 뜻을 아직 장일은 모른다. 그리고는 갑자기 달려들어 깊은 키스를 한다. 그 자체로는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만이 할 수 있는 모션이었지만 그들 사이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다음날 아침, 수미는 장일의 침대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지난밤의 일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모를 리 없는데도 잠든 장일의 얼굴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장일은 잠꼬대로 지원을 찾는다. 씁쓸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오는데 비가 내리고 있다. 수미는 문득 장일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자신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던 장일이었다. 그리고는 우산도 없이 빗속을 빠르게 걷는다.

그런데 수미는 이제 장일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선우는 그것이 가다다라 연습이라 했지만 수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수미는 선우의 점자지를 해석한 것이 분명했다. 그 점자지의 내용은 선우가 감추고 있는 비밀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장일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기 전 수미는 선우가 쓰던 점자지를 캔버스에 대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수미가 이처럼 선우에 대해서 장일보다 더 철저히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장일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서 알고, 또 그 비밀을 지켜 장일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저 범죄로부터 숨고 싶은 장일보다 더 적극적이고도 집요할 수 있다. 장일에게는 선우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수미처럼 냉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수미는 선우와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점자를 배웠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애초에 선우의 본심을 알아내기 위해서 배웠을 거란 의심도 해봄직 하다. 그만큼 장일에 대한 수미의 집착은 무섭도록 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태도는 대단히 침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수미는 유일하게 모든 비밀을 아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장일의 입장에서는 그런 수미여서 다행이지만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한다. 아니 오랫동안 자신을 좋아하는 수미를 경멸한다. 경멸하는 수미와 잠을 자버린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이며 자학이다. 수미와의 잠자리는 선우의 뒤통수를 친 것과 다르지 않다.

수미는 어쩌면 선우보다도 불쌍한 인물이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이렇게 여자의 처음을 보내기에는 너무도 수치스럽고 가련한 동기였다. 게다가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장일의 비밀은 수미도 알다시피 선우가 이미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수미의 집착은 큰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양심과 우정 모두 저버리고 사랑을 위해 지옥을 선택한 수미에게 장일의 몰락은 결국 이중의 지옥을 경험케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데도 장일을 포기하지 않는 무서우면서도 가련한 여자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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