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설경과 함께 펼쳐진 2012년의 서준과 정하나는 70년대 인하와 윤희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답답 인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 바람둥이 사진가 서준을 낳았고, 소심 윤희는 팔딱팔딱 뛰는 발랄 그 자체인 가드너 하나를 키웠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아들과 딸에게 전해진 기억 속의 70년대 사랑은 참 많이 달랐다.

두 사람 모두 첫 사랑을 잊거나 외면하지 못했지만 인하는 그 때문에 아파했고, 윤희는 그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 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이지만 남녀가 그것을 추억 속에 키워가는 방법은 참 많이 달랐다. 여자의 몫은 모르겠지만 남자의 증상은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준과 하나는 일본 북해도 어디쯤의 역에서 부딪히면서 처음 대면한다. 그런데 거기서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그 짧게 부딪힌 순간에 하나의 휴대폰이 준의 주머니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그 휴대폰으로 인해 준과 하나의 파란만장한 첫 이야기가 시작된다. 70년대의 일기장에 이어 2000년대의 휴대폰으로 오브제를 연결시키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냥 떨어뜨리고 간 것도 아니고 주머니로 들어간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연은 소매치기 뺨 칠 솜씨로 하나의 휴대폰을 슬림한 준의 옷 주머니에 아무도 모르게 넣어두었다. 그러나 휴대폰에 매인 인연은 악연이었다. 하나는 휴대폰을 찾기 위해 준을 찾아 다녀야 했고, 급기야 온천에 빠지게 됐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시청자가 상황에 몰입하기에는 다소 억지스러운 모티브였다.

그러나 휴대폰이라는 옥에 티를 뺀다면 사랑비는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과 준과 하나라는 싱싱한 캐릭터의 등장으로 흥미롭고 흐뭇한 순간들을 엮어갔다. 70년대 한국 풍경들이 인하와 윤희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소박하고도 우울한 색채였다면 2012년의 사랑비 풍경은 하얗고 밝은 달력사진 같은 색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하와 윤희의 아들딸이 이렇게 기가 막힌 우연으로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되는 모티브였다. 바람둥이 서준은 3초 만에 여자를 꼬신다는 전설의 미모를 갖고 있다. 게다가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아파하는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멘트를 날리는 고독한 남자의 모습까지 겸비했으니 찍으면 넘어가지 않은 여자는 없을 거라는 설득력이 넘쳐나는 설정이다. 장근석이니까.

반면 일본에서 가드너 전공하는 하나는 사랑스러움이 넘쳐나는 여자다. 준과 달리 하나는 엄마와 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보통은 비극적 사랑은 남자들의 로망에 더 가까운 법인데 성격은 갓 잡은 활어처럼 팔딸팔딱하지만 속으로 그리는 사랑은 70년대 고전주의라니 여자는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할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나의 성격은 휴대폰 벨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진다. 방송이 끝난 뒤 정말 그런 벨소리가 존재하나 벨소리 제공업체에 검색이 폭주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소식이 그 후폭풍을 알려주듯이 드라마를 통해서 다양한 벨소리를 경험했지만 정하나의 벨소리는 발랄함과 약간의 촌스러움까지 더해져 더 이상 귀여울 수 없는 하나의 캐릭터를 강력하게 대변했다.

이제 창과 방패가 만났다. 3초 만에 여자를 꼬실 수 있는 마력의 서준과 사랑스러움으로 넘쳐나는 정하나가 만났다. 그러나 모순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패를 찌르려던 창이 제 풀에 꺾이고 만 것이다.

다이아몬드 스노우에 빠져서 촬영을 하다가 그만 동사지경에 이른 서준은 하나가 안내해준 무료온천에서 몸을 녹이기로 했다. 그러다가 휴대폰을 몰래 가져가려던 하나를 제지하다가 그만 휴대폰도, 하나도 함께 물에 빠졌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하나도 이제는 하릴없이 온천욕을 하게 됐는데, 잘난 척 왕자인 서준이 어떤 여자에게도 통한다는 멘트를 하나에게 날렸지만 하나는 무슨 소리하냐는 투다.

거꾸로 하나가 똑같이 준에게 했을 때 준은 마치 자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1초, 2초, 3초 하는 하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부전자전이었다. 서준도 인하와 마찬가지로 윤희 모녀에게 3초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같이 사랑에 빠졌던 윤희와 달리 하나는 준에게 절대 반감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한동안은 티격태격 파란만장한 연애담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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