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장일에게는 두 가지 심리가 존재한다. 비록 선우가 기억이 없고, 시력도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원죄로 인한 불안심리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실이 진짜이기를 누구보다 바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일은 항상 선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며 그 불안과 기대의 줄타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장일의 심리는 일말의 양심과 죄책감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에 최소한 인간적인 연민이라도 가질 소지라도 있다. 그러나 불안과 기대라는 불안한 규형은 작은 영향으로도 깨지기 마련이다. 장일이 갖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은 사실 진실이라고 볼 수 없다. 에고이스트답게 자기만족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고통을 백신처럼 스스로에게 주입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이 약속을 어겨 지원이 선우를 도와 아파트까지 동행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장일은 선우에게 분노를 느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지원이 선우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고, 그것으로 인해 아주 불안정하게 갖고 있던 양심마저도 저버리게 된다.
선우가 집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당장 올라가 쫓아내겠다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러다 우리 벌 받아요”라고 일침을 가한 장일의 말은 결과적으로 가식이며 위선일 뿐이다. 장일이 학교 세미나에서 생명의 존중에 대해서 지지한다는 말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지 지식적인 동의이며, 계산된 의견표출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선우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부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으로 위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겪는 불안 때문에 결국 술에 취하자 선우를 폭행한다. 그러면서 “나한테 싸움을 가르치던 선우는 어디 갔냐”며 소리친다. 술기운에 기댄 장일의 본성 깊은 곳에는 그렇게 두들겨 맞고 끝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양심의 소리로 해석하기 힘들 정도로 장일은 황폐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가 항상 그렇듯이 지원이 선우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게 된 동기는 장일 때문이다. 약속했던 시간에 장애인학교에 도착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장일은 자신의 문제는 전혀 돌아볼 수 없는 외눈박이가 된 지 오래다.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좀 더 선우를 잘 보살펴서 지원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고 해야 하는데 장일은 엉뚱하게 지원을 다그치기만 할 뿐이다.
자신의 죄로 인한 불안과 조급함 때문에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결국 아버지까지 둘 사이를 오해해 학교까지 찾아와 지원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된 이상 둘 사이가 영화를 볼 때처럼 핑크빛을 띠기는 틀려버린 일이다. 결국 지원이 선우에게 호의와 연민을 넘어서면서 장일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더 이상 위선의 가면조차 무의미한 본격적인 악행을 하게 될 것이다. 장일은 점점 더 용서받지 못할 놈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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