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트를 금줄과 함께 찾은 선우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날이 기억났다. 앞을 보지 못하지만 선우는 그 기억에 참지 못하고 달렸다. 빨리 달리면 더 많은 기억을 찾을 수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몇 걸음 달리지 못하고 넘어지는 순간 화면은 나무에 매달린 아버지에 부딪혀 넘어졌던 장면으로 넘어갔다.

선우가 결정적 기억의 실마리를 푸는 산속 아버지와의 아지트로 가는 장면은 5회의 하이라이트였다. 현실과 기억 속 과거가 절묘하게 연결되면서 선우는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굴러야 했다. 배우 엄태웅의 연기도 점입가경으로 일품이지만 이 장면을 만든 것도 과연 미스터리를 다룰 만한 연출이었다. 배우들의 연기에 질세라 감독의 연출도 정말 제대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연출이 보이기가 쉽지 않은데, 그 좁은 틈을 비집고 김용수 감독은 꽤나 분발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장일이 자기 뒤통수를 쳤던 날의 기억까지 쭉 이어진 것은 다행이지만 또한 불행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쫓았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가장 친한 친구였던 장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전에 왜 장일이 자신에게 그랬는지 먼저 알고 싶었다. 마지막 날의 기억을 찾은 후의 선우의 감정은 분노보다 경악과 의문이 더 컸다. 아직은 기억들의 퍼즐이 모두 맞춰지기 전이라 가장 친한 친구 장일과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장일의 방정식을 풀기가 힘든 탓이다.

그러는 와중에 장일은 그저 선우가 기억을 되찾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진 회장 앞에 굽실거리기만 하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에 자신의 출세가도를 포기할 수 없는 장일은 부산까지 와서도 선우를 만나지 않고 도로 서울로 올라가 버린다. 그렇게 선우를 회피하는 장일을 서로 연결시켜준 것은 수미였다.

겉으로는 선우가 눈도 고치고, 앞으로 살 길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수미의 진정한 목적은 장일과 가까워지기 위함이다. 아직 내색은 하지 않지만 이미 기억을 되찾은 선우도 짐짓 모른 척 수미의 뜻에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그 첫날 밤, 서로 자기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진실의 눈치싸움이 팽팽하게 진행됐다. 선우는 장일을 떠보고, 그런 선우에게 장일은 시치미를 떼며 기억의 유무를 파악하려 애쓴다. 그런 둘의 숨 막힐 듯한 대화를 조용히 엿듣는 수미다.

그런 한편 장일은 고등학생 때부터 마음에 두었던 지원에 대해서 끈질긴 구애를 한다. 그런 장일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지원이 찾은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안. 흥미로운 것은 지원을 기다리며 장일이 보던 영화가 알랑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였다. 상황은 다르지만 그 영화 역시 친구를 죽인 사건이 주요 모티브였다.

미스터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작가와 감독은 화면과 인물 그리고 사건들 속에 크고 작은 함정과 힌트를 숨겨놓기 마련이다. <태양을 가득히>를 보면서도 아무 반응이 없는 장일은 점점 죄책감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오직 자신의 이유와 필요만 챙길 뿐인 철면피가 되어간다는 복선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장일의 타락에 결정적인 기름을 붓게 될 것은 역시나 여자. 지원이가 선우와 가까워지는 일이 될 것이다.

동시에 지원은 수미에게도 커다란 동기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장일 때문에 선우를 데리고 서울까지 올라온 수미지만 정작 장일이 지원에게 빠져있음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한 질투심이 어떻게 선우와 장일 사이의 문제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될지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수미와 장일 모두가 깜짝 속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선우는 적어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범인이 장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금줄을 시켜서 장일에게 편지를 쓰게 하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역시나 소름끼치는 반전이었다. 아무 가정도 싣지 않고 덤덤히 말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 분노의 무게를 훨씬 더 무겁게 했다.

"아 이런, 중요한 말을 빼먹었구나.,,, 장일아 난 모든 일을 기억한다. 네가 왜 그랬는지 알 거 같아. 난 널 용서할 수가 없어. 죽는 날까지 널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선우는 복수를 위해 아니 심판을 위해 모든 진실을 알기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중생활을 선택했다. 게다가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우의 연기를 눈치 채기 어렵다. 자신에게 욕망이라는 가면을 썼던 친구들에게 선우는 기억상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응대하기 시작했다. 선우가 점점 독기를 품어감에 따라 두 얼굴의 명암도 더 짙어질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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