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가 지난달 30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2일에야 알려졌다. 숨진 이○○씨는 1995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해 15년을 일했으며, 2009년 77일의 옥쇄파업에 참여하였고, 해고 이후 3년이 다 되도록 취업을 하지 못해서 많이 힘들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의 죽음은 돌연사와 자살을 합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22번째 죽음이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는 오늘 오전 11시에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가 평택역에 내렸을 때는 이미 11시 50분. 트위터에는 기자회견이 끝나고 쌍용자동차 정문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었다. 정오의 쌍용차 정문은 한산했고 분향소의 사람들은 말이 없었으며 몇몇 기자와 시민들이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정문 앞 희망텐트에서 흘러나오는 스피커 소리만이 그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쌍용차 정문앞에 차려진 분향소

알고 보니 옆에 있는 사무실에서 간담회가 열리는 중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있었다. 기자도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잠깐 간담회를 목격했다. 침울한 발언의 목소리들이 크지 않아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는 얼굴들이 몇 보여 눈인사를 했지만 입을 열어 말하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 침울한 발언들이 이어진 간담회 풍경

비극적 죽음 때문에 생겨난 그 침울한 공기를 마시면서, 역설적이지만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졌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채 취재를 작파하고 바로 분양소 옆의 밥집으로 갔다. 김치찌개 하나 시키며 소주도 간절히 당기는 심정이었지만 남은 취재를 위해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가 고픈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 밥이 나오기도 전에 분향소와 간담회 장소에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밥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분향소 앞에서 침울한 공기에 짓눌렸던 사람들은 밥집에 들어와서야 조금씩 웅성웅성 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말이 안 나오네 말이. 지부장 울부짖네. 울부짖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기자가 오기 전의 기자회견 분위기를 말하는 듯했다. 그 테이블의 사람들이 그 후 비상연락망 체계의 문제와 조직의 문제 등에 대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테이블은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은 듯 했다. 밥이 나오기 전에 선거 공보물을 늘어놓고 품평을 하기 시작했다.

“안 좋아. 이게 차라리 녹색은 지향이 다르니까 알아듣는단 말야. 근데 통진(통합진보당)이랑 진신(진보신당)이랑 뭐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설명해? 번호도 너무 뒤야.”

그 테이블의 사람들은 다들 공보물을 펴놓고 디자인이나 정책 내용 등에 대해서 이런저런 품평을 하였다. 진보신당 공보물과 녹색당 공보물이 중요한 비교대상이었고, 평택갑 지역에 출마한 6번 진보신당 김기홍 후보 공보물에 대해서도 여러 말이 오갔다. 몇 사람은 공보물 문제를 넘어 노동조합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의 초라한 현실과 향후 전망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진보정당 사람들을 만났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술자리가 아닌 밥집에서의 정치토론은 지나치게 조곤조곤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한 사람은 아이폰을 들고 다른 사람에게 공보물의 QR코드를 보는 방법을 물어보고 있었다. 질문을 받는 사람도 아이폰 유저였다.

“누가 되든 노동자 입장에서 뭔 차이가 있어. 안 나오면 5% 잘 나오면 10%일 텐데 이래가지고 뭐가 되겠어.” / “복지 복지 하는데 복지 해봤자야. 비정규직은 받는 것 자체가 이것 밖에 안 되는데 복지만 해서 문제가 해결이 돼?” / “그래서 민주노총이 어떻게 해야 하나면…”

기자는 귀를 쫑긋이 세운 채 밥만 먹었다. 그들에게 소감을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평택에 온 김에 쌍용차 해고노동자 및 그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공간 <와락>을 들르기로 했고 다시 옆 사무실로 가 <와락>에 가는 방법을 문의했다.

사무실 사람들도 ‘밥’을 먹으려는 참이었다. 큰 솥에 끓인 라면을 나누는 중인 듯했고 말아먹을 밥도 옆에 있었다. “식사하고 가세요?”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미 먹고 왔어요”라고 답해야 했다. 속으로는 그냥 여기서 먹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할 생각이 아닌 듯 했지만, 라면이 참 맛있어 보였다.

▲ 분양소를 지키는 노동자들은 점심식사를 라면으로 때우고 있었다. 볼품은 없어 보이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연대'의 끈처럼 보인, 양은그릇 속 라면 가닥. 그 라면, 참 맛있어 보였다.

“분향소 사람들도 드시라 그래?” / “교대로 먹으라 그래야 하나?” / “아니 라면을 어떻게 교대로 먹어? 지금도 불었구만.” / “그럼 갖다주지 뭐. 밖에서 먹는 라면이 더 맛있어.”

이런 말들이 오간 후 사람들은 커다란 쟁반에 다섯 개의 라면을 담아 분향소 앞으로 날랐다. 나는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이면서 ‘와락’ 센터 소장인 권지영 님의 연락처를 얻어냈고 밥을 먹는 사람들의 곁을 떠났다.

‘와락’은 평택역 근처에 있었고, 쌍용자동차 공장에서는 도보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듯했다. 시간은 오후 2시 30분, 여성들이 아이를 이끌고 센터에 모이기 시작했다. 권지영 님에게 “분향소 앞에서는 말을 걸 엄두가 안 나서 이곳으로 왔다”고 설명드렸다. 매체에선 많이 접했지만, 기자로서도 ‘와락’ 첫 방문이었다. 권지영 님은 기자에게 “식사하셨냐”고 물었고 기자는 “배불리 먹었다”고 답했다.

“이○○씨의 전화가 와락으로 두 번 왔었어요. 저희가 주로 아이들 심리치료로 알려져 있잖아요. 그 프로그램 관련해서 뿌려진 단체문자를 받으셨나봐요. 처음에 전화왔을 때, 약간 술에 취하신 것 같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프로그램 관련해서 문의하기에 전화받은 사람이 ‘아이가 있으시냐’고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신 후 별다른 말을 안하고 끊으셨다고 하더라구요.”

이번에 사망한 이○○씨는 결혼을 한 적이 없고 혼자 살고 있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심리치유센터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쌍용차의 책임을 규탄하는 현수막

“두 번째로 전화가 왔을 때는 저한테 바꿔달라고 했어요. 뭔가 할 말이 있어 전화를 한 것 같긴 한데 횡설수설하셨다고 했어요. 제가 받고서 이것 저것 물어보자 갑자기 그 분은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끊으셨어요. 그래서 그저께 소식을 듣고 충격이 컸지요. 여기 전화온 게 ‘신호’였을지도 모르는데……. 다들 자책하는 마음이 너무 컸어요. 너무 우울해져서 말이 안 나왔어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해고노동자 가족들이고 그러니까요. 우리가 당사자이니까요. 근데 저희가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건 센터운영에 도움이 안 되니까, 어제 회의에서, 우리가 앞으로 표정 하나라도 놓쳐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자,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자고 했어요. 그래도 자책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는 없네요.”

먹먹한 얘기를 들으면서 함께 먹먹했다. ‘와락’은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러니까 피해자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고 있다. 2009년 옥쇄파업 이후 이어진 투쟁현장에서 정신과의사 정혜신 박사가 투쟁하는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상담을 자처했고 가수 박혜경 등이 함께한 ‘레몬트리 공작단’이 해고노동자와 그 아내들이 상담받는 동안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자원봉사를 했다.

그리고 레몬트리 공작단은 봉사를 하다가 그 아이들이 어른들 못지 않게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정혜신 박사는 고문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보듬기 위해 만든 ‘진실의 힘’의 경험을 활용하여 심리치유센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17번째 사망자가 나오면서 ‘더 이상은 죽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정혜신과 레몬트리 공작단의 일 년여에 거친 꾸준한 노력으로, ‘와락’은 지금의 넓은 공간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와락’은 본질적으로 볼 때 ‘가해자’들은 가만히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서로를 구제하겠다고 만들어낸 단체인 거다.

“억울하달까… 황당하달까… 더 이상은 사망자가 없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는데, 계속 죽어나갔고 이제 22번째 사람이 죽었어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보려 애쓰고 죽기도 하고 그러는데, 회사측은 아무런 반응도 움직임도 없는 거잖아요. 죽음이 마치 바이러스처럼 전염되어 우리 사이를 떠도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모든 것을 잊고 싶고, 이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관계망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지 않겠어요?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어떻게 항의를 해서라도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있지 않겠어요? 다들 그 두 마음이 싸우는 상황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이제 빈소를 가보면 또 우리들밖에 없어요.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 근데 지금 저희는 사실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거든요. 다들 자기들도 아픈 사람이지요. 근데 빈소에 가면 또 우리들끼리 위로를 합니다. 상황이 그래요……”

▲ 해고노동자가 죽어도 회사는 지속된다. 파업 이후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생긴 출입증 시스템, 그리고 회사를 드나드는 차량의 모습

정혜신 박사는 ‘와락’을 만들어낼 때 평택시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원래는 공간지원도 평택시에서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쓰고 있는 넓은 공간은 민주노총 평택안성지부와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실로 쓰던 공간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택시와 고용지원센터에서도 각각 5천만 원을 지원했다. 시민후원금은 <나는 꼼수다> 23회 방송에서 주진우 기자가 지지를 호소한 이후 2억 원 가까이 모였다. ‘와락’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후원이 필요한지 궁금했다.

“1년을 유지하는데 1억은 든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월세도 있고 인건비도 있고……근데 여기서 사업을 더 늘리려고 하다 보면 비용이 더 늘어나지요. 가령 최근에 저희가 반찬만들기를 했단 말이에요. 이번엔 5~60만 원 밖에 안 들었는데, 이건 신청자가 적어서 그런 거죠. 만일 해고노동자 3천명 대상으로 확대한다고 그러면, 전화해서 다 불러내고 하게 된다고 하면, 비용이 훨씬 늘어나는 거잖아요. 근데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이○○씨처럼 혼자 사는 분들도 혜택을 받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연 2억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죠. 이걸 왜 우리가 다 해야 하느냐… 훨씬 더 체계적이고 인원파악도 잘 하는 국가가 어느 정도 나서주면 안 되냐… 뭐 이런 생각이 들죠.”

평택시의 지원과 시민들의 정기후원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평택시와의 협의에 좀 문제가 있어요. 내년까지는 후원을 더 받고 그 다음해부터 자립을 시도해보는 식으로 가려고 했는데, 예산을 주기는 주되 다른 목적으로도 활용해 줄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에요. 답변을 안 드렸어요. 경기도가 자살률이 엄청나게 높아요. 그래서 위탁 보건소라든가, 그런 쪽으로도 예산이 필요해요. 자살예방 문화 연극제 이런 것도 하구요. 그런 일들에 대한 지원도 ‘와락’에 책정한 예산과 함께 쓰겠다는 거거든요. 공무원들이 말해요. ‘시민들이 왜 당신들만 지원하냐고 한다. 쌍용차 노동자들만 지원하냐고 한다’. 특정한 사람만 지원하는 사업이 안 좋다는 생각이 공무원들에게 있어요.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뭔가를 자꾸 만들어내라고 하거든요. 근데 원래 저희 생각은, 2억 정도를 예산을 받으면, 6천~7천 정도는 해고 문제와 관련해서,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재를 만들기 위해 쓸 생각이 있었어요. 쌍용차 투쟁은 지역민에게도 상처로 남은 기억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보듬어 가면서 해고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홍보도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요. 하지만 지원을 하되 예산을 다른데에 쓰게 해달라고 하는 상황이니 전혀 생각이 다른 거죠. 그래서 아직 답을 안하고 있고, 지원받은 예산은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정기후원 규모는… 지금은 200명 정도입니다.”

쌍용차자동차 투쟁과 언론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면 해고노동자들은 언제나 “쌍차투쟁만큼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은 투쟁이 없다. 복받았다”고 답하곤 했다. 그러나 그 ‘복받은 투쟁’의 당사자들이 죽어나가고 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픔을 느끼고 있다.

당시 쌍용차노동자들은 해고통지를 받은 이들을 ‘산 자’라 표현했다.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를 들고 투쟁에 나섰다. 기자는 당시 이 구호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기자가 원하는 사회는 해고가 더 힘든 사회이기도 했지만, 해고당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지원을 받고 다른 직장을 택해 잘 살 수 있는 사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현실을 전제조건으로 윽박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구호는 옥쇄파업 후 2년 동안 현실이 되어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 우리 사회에서 정말로 해고는 살인인 것일까?

우리는 제법 쌍용차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 같지만 그들에겐 아직도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와락’에 후원금을 보내는 시민이 있는가 하면 공무원에게 “왜 저들에게만 지원이 가느냐”고 항의를 하는 시민이 있다. 쌍용차노동자들의 옥쇄파업을 다룬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당신과 나의 전쟁>이었다. 기자는 이 다큐멘터리를 볼 때부터 이 제목이 ‘당신’과 ‘나’가 함께 하는 전쟁을 일컫는 것인지 ‘당신’과 ‘나’ 사이의 전쟁을 일컫는 것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중의적인 의도 사이에서 기자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사람이 죽어도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 가며 그 옆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외면하면서 먹는 밥과 기억하면서 먹는 밥엔 차이가 있을 게다. 다시 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와락’을 떠나면서 내가 ‘와락’에 한 달에 얼마를 후원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봤다. 머릿속으로 금액이 요동치면서 잘 가늠이 오지 않았다. 기억을 하면서 밥을 먹는 일은 쉽지가 않다.

▲ '와락'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 사진 찍는 것을 저어할까봐 창문 너머로 찍었다. 기자는 바보같이 권지영 님의 사진을 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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