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역사책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도구가 바로 석기이다. 그런데 그저 돌덩어리처럼 보이는 이 석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용도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석기시대인들은 용도에 따라 돌을 저마다 다르게 벼렸다. 우리 눈에 뭉툭해 보이는 그 돌덩이는 벼린 면에 따라 칼처럼 쓰였다. 그처럼 '칼'의 역사는 깊다. 역사 속에서 칼은 사냥을 하거나 전쟁에서 무기로 활약하며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의 칼은 우리 일상으로 들어와 미식의 도구로 거듭났다. 3월 25일 방영된 MBC 다큐플렉스 <칼과 불> 2부 '칼의 맛' 편에서는 미식의 도구로서 칼을 조명한다.

칼로 요리가 되다

MBC 다큐플렉스 <칼과 불> 2부 '칼의 맛' 편

경북 포항 죽도 지게차에 2m 50㎝가량의 개복치가 실려 온다. 과연 이 개복치 한 마리를 해체하는 데는 몇 개의 칼이 필요할까? 우선 장화를 만들 만큼 두꺼운 껍질을 잘라내기 위해 50㎝짜리 큰 칼이 필요하다. 주변을 해체하기 위해 중간 칼도 필요하고, 연한 살을 토막내기에 걸맞은 칼이 또 필요하다. 이처럼 칼은 용도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용도에 따라서만 달라지지 않는다. 같은 아시아 국가라도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 요리 방식이 다른 세 나라의 요리에 필요한 칼은 또 전혀 다르다.

칼로 시작되는 요리 하면 아무래도 스시로 대변되는 일본 요리가 떠오를 것이다. 일본 요리를 다룬 만화에서도 ‘요리를 통해 도를 깨친 최고의 장인'이라 칭송된, 45년 일식요리의 장인 안효주 셰프를 통해 일본 요리의 '칼 맛'에 접근한다.

매일 아침 숫돌로 칼 갈기부터 시작하는 그의 일상. 섬세한 일식 요리를 위해서는 생선 뼈를 잘라낼 정도의 '데바보초', 채소를 다듬을 수 있는 얇은 칼날의 '우스바', 그리고 버드나무 잎처럼 뾰족한 '야나기바'까지 세 종류의 칼이 필요하다. 일본 칼은 잘라 넘길 수 있도록 외날 칼이다. 고수일수록 단칼에 생선을 자른다. 먹는 이가 느껴지도록 '시리도록 서늘한' 칼의 맛, 칼과 셰프가 한 몸이 되어 절묘한 칼의 맛을 풀어내는 것이 바로 일본 요리의 맛이다.

MBC 다큐플렉스 <칼과 불> 2부 '칼의 맛' 편

반면 불맛이 더 강조되는 중국 요리는 '차이다오', 단 한 자루로 해결된다. 하지만 차이다오 단 한 자루라고 해서 얕잡아볼 일은 아니다. 그 무거운 사각 칼을 어떤 방향으로 쓰는가에 따라 요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크기나 무게가 상당한 반면, 얇고 정교한 칼날을 지닌 차오다오는 고기‧야채‧해물 등 다양한 식재료를 얇게 저며내는 '피엔', 채를 써는 '쓰', 덩어리로 자르는 '콰이', 다지는 '모' 등 맛과 모양, 질감을 달리하며 다양한 칼의 맛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우리의 칼 맛은 어떤 것일까? 직접 칼을 넣어 재료를 용이하게 다듬어 내도록 버선코를 닮은 우리 칼은 만드는 재료부터 만만치 않다. 모래를 훑어 철가루를 모아 제련을 하고 망치질로 내리쳐 칼 모양을 만들고, 다시 진흙을 발라 물과 기름에 담금질을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 자루의 칼이 탄생된다.

우리 요리의 다양한 칼 맛

MBC 다큐플렉스 <칼과 불> 2부 '칼의 맛' 편

우리 칼의 맛은 칼 자체보다, 그 칼을 다루는 과정에서 빚어진다. 여기 무 한 개가 있다. 깍두기를 담그려면 무를 어떤 방향으로 썰어야 더 맛깔날까? 그저 툭툭 깍둑썰기하면 될 줄 알았던 요리 하나도 그 재료의 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원 모양으로 둥글썰기, 그걸 다시 반 자르면 반달썰기, 그걸 또 반을 나누면 은행잎 썰기처럼 써는 방식도 다 다르다. 어디 썰기만 있을까? 돌려깎기도 있고, 채를 썰 수도 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무를 세로로 나박나박 썰면 아삭한 식감이 살려지고, 빚어썰기처럼 단면을 가장 넓게 살리며 저미듯 썰어내면 요리 과정에서 화학반응을 극대화시켜 국 등의 깊은 맛을 내는데 어울린다.

그런데 한식의 묘미는 칼이라는 영역의 무한 확장, 혹은 자유로움에 있다. 다지고, 자르고, 도려내는 등 다양한 요리 방식을 위한 다양한 칼들. 하지만 한식의 칼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안쪽이 우툴두툴한 널찍한 옹기 안에 돌로 마늘, 고추 등을 갈아내는 확독 또한 칼의 연장이다. 떡을 자르는 데는 칼의 쇳내가 스며드는 걸 막기 위해 '나무 칼'이 사용된다. 나무 칼이 없을 때는 손이, 접시가 칼의 역할을 했다 하니 칼질의 융통성은 끝이 없다.

무엇보다 우리 식 칼질의 절정은 '가위'에 있지 않을까? 식당에서 등장하는 가위에 외국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자르고, 뜯고, 쪼개고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밥상 위의 재료들을 해체하는 가위는 칼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밥상 위의 멀티플레이어이다.

MBC 다큐플렉스 <칼과 불> 2부 '칼의 맛' 편

전문가는 그런 멀티플레이어 가위의 시작을 그 옛적 '엿장수 가위'에서 찾는다. 원래 목적과 다르게 진화한 가위는 식탁에서 직접 조리의 도구로 쓰일 뿐만 아니라, 그 가위를 통해 먹는 이가 직접 요리에 참여하게 되니 '다이내믹한 우리 식탁'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밥상 위 멀티플레이어에 가위만 있을까? 젓가락도 또 하나의 칼이 된다. 전처럼 우리 요리는 큰 덩어리를 그대로 밥상 위에 올린다. 그러면 젓가락이 나서서 그걸 나누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만든다. 이처럼 우리 요리 속 '칼의 맛'은 다양한 도구들의 활용에서 그 참맛을 만들어 낸다.

'먹는 것을 말해주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이제 같은 아시아 국가라도 한중일은 각자의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칼질을 통해 다양한 맛의 문화를 창조해냈다. 마치 화가의 붓처럼 칼 한 자루를 통해서도 다양한 맛이 구현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만이 만들어낸 식문화의 현장이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