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닝>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2018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지만 이창동의 작품세계로 본다면 1997년 작품인 <초록물고기>의 각색 같기도 하다. 약 20년의 간극을 두고 ‘한국 사회 계층화에 따른 청년 세대의 태도를 바라보는 이창동 감독의 시선’이라는 주제로 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두 영화의 주인공은 같은 또래로 청년 세대를 대변한다. <초록물고기>의 막동이(한석규)는 이제 막 전역을 해서 고향에 돌아왔으니 20대 중반 정도. <버닝>의 ‘종수(유아인)’는 정확한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했다 했으니 별일 없으면 20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주인공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은 각각 배태곤(문성근)과 벤(스티븐 연)인데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추측된다. 기성세대라 하기에는 젊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선배 세대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1997년 <초록물고기> vs 2018년 <버닝>

‘중산층 진입을 위한 악다구니’와 ‘계급 고착화로 인한 무력감’은 20년을 구분 짓는 키워드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동과 태곤 두 사람은 일산이라는 공통의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대로변 하나를 두고 개발지역과 미개발지, 도시와 농촌으로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이제 막 성장하고 동시에 퇴락하기 시작한 혼란스러운 신도시를 배경으로 청년 세대와 선배 세대가 서로를 짓밟고 먹이로 삼아 아득바득 도시 중산층으로 확고히 자리잡기 위해 경쟁하는 구도가 <초록물고기>의 뼈대다.

반면 <버닝>에서 종수의 거주지는 고양시 일산보다 더 북쪽으로 올라간 파주, 거기서도 휴전선을 코앞에 둔 그야말로 깡촌이다. 벤은 서울의 고급 주택가에서도 손꼽히는 반포 서래마을에 산다. 작업용으로 트럭을 모는 종수와 드라이브를 위해 포르쉐를 모는 벤의 차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거주지를 방문하긴 하지만 그 이상의 접점은 없다. 두 사람의 공통분모인 해미(전종서)가 사는 후암동에서도 둘이 마주치지 않는다. 종수와 벤의 생활반경에서 물리적인 교집합은 전무하다.

종수와 벤 사이에서는 정서적 교집합도 찾을 수 없다. 나중에 뒤통수를 맞긴 하지만 막동이는 어쨌든 태곤과 감정적으로 교류한다. 태곤에게 동생 같다는 소리도 듣고 그의 신임을 얻어 기존의 꼬붕들을 제치고 넘버투의 자리까지 올라간다. 도시빈민층 탈출 막차의 손잡이라도 잡아본 것이다. 하지만 벤과 그의 친구들은 종수와 해미에게 어떤 종류의 신뢰를 드러내지도, 도움의 손길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상석에 앉아 광대의 재롱을 보듯 모든 감정적 교류를 차단한다. 노골적인 경멸과 조롱의 시선은 원치 않는 덤이다.

종수는 벤의 태도에서 불쾌함을 느끼지만, 해미에게만 미약하게 감정을 토로할 뿐 벤에게 직접적으로 분노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본인이 원하는 작가가 되거나 아버지 세대부터 이어져 온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 같은 벤에게 단 한 번도 구조요청을 하지 않는다. <버닝>은 현재가 지옥 같음을 인지하면서도 계급 고착화를 깨부수겠다는 의지마저 상실한 청년 세대의 무력함이 강렬하게 묻어난다.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벤은 ‘뼛속 깊이 울리는 베이스 소리’를 찾아다니지만, 계급전복의 위험은 느끼지 않는다. 벤은 종수의 미행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듯 보인다. 종수가 본인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찬 것처럼. <초록물고기>에서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막동이를 희생양 삼아 거리낌 없이 칼침을 놓던 배태곤의 절박함과는 다르다. 노는 것과 일하는 걸 구분하지 않아도 현재의 계층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된 궤도에 이미 올라탄 덕분일 것이다.

종수는 과연 진짜로 벤을 죽였을까. <초록물고기>와 <버닝>을 관통하는 세계관에서는 종수가 쓰기 시작한 소설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분노조절장애인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았다지만 종수는 현실에서 제대로 분노를 표출한 적이 없다. 꿈속에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목격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 또한 종수가 방화라는 증거는 없다. 영화상에서 종수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건 미행뿐이지만, 그 역시 해미가 키우던 것으로 추측되는 고양이 ‘보일’을 만나고 벤의 화장실 서랍장에서 여성용으로 보이는 장신구들을 확인한 후에는 ‘물어볼 게 없어졌다’며 허무하게 뒤돌아선다.

어머니의 옷을 태우는 것도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고양이에게 밥 주는 것도 해미의 부탁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종수가 갑자기 벤을 살해한다는 전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배태곤의 차에 들러붙어 허연 입김을 뿜어내던 막동이의 끈질김과는 다른 무력한 종수.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 섞인 <버닝>의 연출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유일하게 드러난 카메라 구도를 고려한다면 마지막 장면이 소설이라는 확신은 더욱 강력해진다.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2018년 <버닝> vs 2022년 <버닝>

<버닝>의 미덕 두 가지는 영화가 개봉한 2018년의 시선과 5년이 흐른 2022년에 봤을 때 상상할 수 있는 또 다른 결말에도 개연성을 부여한다는 점과 지금까지와 다른 이창동의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발 때문에 광주시민을 학살했다는 트라우마로 인생이 망가지거나, 아들이 유괴 후 사망해서 처절한 자기파괴로 복수를 시도하고 손자가 저지른 성범죄를 대속하는 등 <버닝> 이전에 이창동이 창조해낸 세계는 명확한 인과관계로 현실성을 얻었다.

반면 <버닝>은 심증만 가득하고 물증은 없는 세계다. 이창동 감독은 의도적으로 퍼즐의 연결고리를 제거했다. 연결고리를 제거하려는 감독의 의도는 영화 곳곳에서 친절하게 반복된다. 해미가 빠졌다는 우물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늦은 밤 종수의 집에 걸려오던 전화는 미지의 누군가였을 수도 있고 집을 나간 엄마일 수도 있다. 해미가 키우는 고양이 보일도 사실일 수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다. 해미는 벤에게 살해당했을 수도 있고 평소 소원처럼 연기같이 스스로 종적을 감췄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떤 해석도 타당성을 얻는 세계에서는 종수가 벤을 살해하는 게 타당하다. 종수가 바라보는 세계가 그렇게 구성된 탓이다.

586세대인 종수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가정폭력으로 엄마는 도망갔고 70년대에 중동에서 고생하며 돈을 벌었지만, 그깟 자존심 때문에 파주에서 농장을 하다가 쫄딱 말아먹고 송아지 한 마리만 남기고 징역살이를 한다. 선배 세대인 벤은 개츠비 같다. 용산참사를 다룬 작품이 전시된 곳에서 평화롭게 가족 모임을 하고 일을 하는지 노는지 모른다. 노력 없이 부를 성취하며 꿀을 빤다. 또래 여성인 해미는 연애 대상으로 생각했다가 창녀라고 비난한다.

부모도 선배도 애인도 의지하지 못하고 원인도 결과도 인식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를 종수는 버텨낼 수 없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던 외로운 소설가 지망생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이제 하나뿐이다. 벤이 비닐하우스로 비유한 해미를 살해했다는 세계관을 만드는 것. 이 부분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Barn burning』,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와 이창동 <버닝>의 결정적 차이가 나타난다.

‘Burning’는 사전적으로 ‘태우다’와 ‘타다’의 의미가 있다. 내가 불을 지를 수도 있고, 불이 내게 옮겨붙을 수도 있다. 종수는 아버지의 칼을 들고 벤을 찌른 뒤 포르쉐에 석유를 붓고 태운다. 포크너와 하루키가 태우는 건 헛간(혹은 헛간을 메타포로 삼는 어떤 것)이다. 중요한 건 벤이 논두렁에 방치되어 마치 태워지길 기다리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버닝>은 헛간이 아니라 종수가 자신의 DNA에 새겨진 분노에 불을 지피고 자신의 미래를 태웠다.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절망도 구원도 없는 종수들의 불타는 세계

종수의 행동과 비교하면 <초록물고기> 미애(심혜진)의 연장선에 있는 해미의 캐릭터가 더욱 특별해진다. 미애와 해미는 우연한 만남으로 극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다.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미애가 막동이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배태곤의 소유물처럼 그려진 것과 달리 해미는 관계를 주도적으로 설정한다. 벤과 함께 있어도 종수를 보러 간다고 하고, 아프리카에서 돌아와 종수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도 벤과 함께한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소리를 찾기 위해 가벼운 유희에 빠져드는 벤과는 달리 극 중에서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진심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리틀 헝거가 아니라 그레이트 헝거로서 바라보듯 해미는 종수를 연애 대상이라기보다 우물에서 빠져나가게 해줄 동료로 대우한다.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 남자 앞에서나 옷을 훌훌 벗는 창녀라는 원색적인 비난이다. 벤이 살해당하는 세계에서는 해미의 자발적 잠적에 무게가 쏠린다.

<버닝>은 2016년에 초고가 완성됐지만 2017년 탄핵 국면을 거치며 ‘분노 프로젝트’라고 불릴 만큼 젊은 세대의 분노에 집중하는 시나리오로 수정됐다고 한다. 2022년에서 종수와 해미의 대비가 흥미로운 점은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내어 아버지와 선배 세대에 짙은 분노를 표출한 이대남.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과시한 이대녀로 젊은 세대가 나뉘었다는 데에 있다.

<밀양> 촬영 중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신애(전도연)과 종찬(송강호)의 역할이 바뀌는 건 어떻냐는 물음에 이창동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연히 여자가 그 자리에 있어야죠. 남자가 삶에 절망했다고 하면 믿어져요? 남자가 삶의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가슴에 와닿나?”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절망도, 구원도 없는 종수들의 세계가 시작된 한국에서 5년이 흐른 뒤에 <버닝>은 어떤 영화로 다시 해석될까. 그래서 <버닝>은 아직 태울 게 남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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