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MBC의 예능 프로그램 제작과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파업의 장기화로 PD는 물론이고 작가를 비롯한 핵심 구성원들이 모두 불참한 상황에서 고위 담당자들을 일선으로 끌어내려 겨우겨우 방송분을 메우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하지만 지난 주말 예능본부 보직부장들까지 보직을 사퇴하면서 이마저도 힘겨워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비상 인력을 총동원하고, 지난 촬영분으로 어떻게든 방송분을 채우고, 이리저리 외주로 프로그램의 공백을 메워가며 버티는 것도 서서히 한계점에 다다른 것이죠.

이런 땜질 처방의 여파는 현저합니다. 프로그램의 질과 경쟁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거든요. 최장기간 결방으로 오늘이 토요일 저녁인지도 까먹게 만들어버린 무한도전의 커다란 빈자리, 결승만을 남겨둔 위대한 탄생이 외면 받고 있는 이유, 매주 핫이슈를 생산해내며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던 우리 결혼했어요의 침체와 지루함, 놀러와의 가장 큰 힘이었던 참신한 섭외와 구성이 사라진 원인 등등(오직 MC들의 확고한 개성과 프로그램의 스타일이 빛을 발하는 라디오스타만이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연예 프로그램의 모든 면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는 형편이죠.

그 중심엔 또 다시 밑도 끝도 없는 추락을 반복하고 있는 일밤이 있습니다. 1박2일과 남자의 자격에게 처참하게 눌리고, 런닝맨을 위시한 SBS 프로그램에게도 밀리는 암담한 상황을 벗어나 부활의 신호를 보여 주었던 일밤이 또 다시 종편 프로그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의 1~2%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나가수 시즌2를 예고하고 있지만 여전히 기획 단계의 논의 이외에 방송 재개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고, 나가수의 파트너가 되어 주어야 할 새로운 아이템 발굴은 시청자들에게 완벽히 외면 받고 있습니다. MBC 파업의 정당성을 향한 시청자들의 지지, 그리고 본업에 집중해야 하는 이들을 거리에 나서게 했던 사장님의 명분 없는 버티기가 만든 대형 참사인 셈이죠.

그리고 이런 소란과 갈등 속에서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정선희. 자신의 본업인 웃음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와는 이젠 너무나도 거리가 먼 지점에 속해버린 그녀가 일밤의 새로운 아이템 모색과 외주 제작으로 버티기라는 두 가지 수를 모두 달성하기 위한 꼼수 프로그램에 이름을 올리면서 또 다시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죠. 아니 보다 명확하게 이야기하면 그녀를 외면해야 하는 명분을 한 줄 더 첨부하고 있어요.

지금 MBC와 일밤의 상황을 안다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 프로그램에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아야 합니다. 현 정부 들어 점점 더 일그러지기만 했던 방송의 정상화라는 대의명분은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노조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프로그램을 보지 못하게 되는 다소 불편하고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많은 시청자들은 이들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며 현 상황을 견디며 조속한 해결을 바라고 있구요. 그러니 아무리 해당 프로그램을 자신의 소속사가 외주 제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혹은 의리나 부탁 때문에 잠깐 얼굴과 이름을 빌려주는 것이라고 변명한다고 해서 이들의 꼼수 프로그램 출연이 정당화되기는 힘들어요. 그들이 함께 일했던, 같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노력했던 이들이 거리에서 투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그 고생을 무마시키기 위한 방송에 출연한다는 것은 아무리 정상을 참작한다고 해도 좋게 보일 리 만무합니다.

하물며 정선희입니다. 그녀가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한다거나, 다시는 방송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의 방송 출연 결정은 다른 누구보다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하고, 조금씩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옳습니다.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녀 자신일 것이지만 정선희를 화면으로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일정한 마음의 여유, 이해를 위한 시간,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과 기회를 주는 것이 올바른 복귀의 순서거든요. 실제로 그녀도 여러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등장하며 조금씩 시청자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밤의 출연은 그동안의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 있는 어리석은 결정이었어요.

오랜 공백을 깬 첫 주말 버라이어티 입성이 파업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일밤의 외주 프로그램이라니. 다른 여러 참가자들 중에서 유독 그녀에게만 화살이 날아가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은 태생적으로 그런 비판에 취약한 방송이었고, 그녀는 그런 비판의 가장 손쉬운 대상이니까요. 가뜩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로 힘겨워하는 와중에 시민으로서의 개념도 의사도 없는 방송인으로 공격받기 쉬운 방송 출연 결정이었다는 것이죠. 누구도 원망하기 힘든, 어떠한 변명도 통용되기 어려운 실수입니다.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 봐도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