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대세 장근석과 소시 센터 윤아의 사랑비가 촉촉하게 찾아왔다.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느리고 흐릿한 영상은 70년대 분위기를 떠올리는 데 더없이 적절한 은유였다. 70년대에 살지 않았더라도 그 시대는 이런 느낌이겠거니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각적 대사였다. 그리고 그 안에 수줍고 또 수줍게 자기 마음을 감추기만 하는 두 남녀 인하와 윤희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그려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비 첫 회의 시각적, 정서적 만족도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티비라는 것이 항상 선남선녀들이 즐비한 곳이지만 장근석과 임윤아에 도전할 예쁘고도, 청순한 조합은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사랑비의 70년대는 지금 20대들은 이해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나 친구가 좋아하기 때문에 “윤희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까지 해놓고도 뒤로 물러나 버리는 인하의 소극적 태도는 티끌만큼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일 수도 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 답답한 남자. 그러나 7.80년대 남자들 대부분이 그랬다면 더 믿지 못할 일이 될 것이다.

요즘의 사랑에 결핍된 지난 시대의 정서들이 아주 소심해 보이는 두 남녀를 통해서 ‘답답해 죽을’ 정도로 잘 그려졌다. 그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면 모두 해결될 상황인데도, 서로 자기 마음을 숨기고, 속이기에 급급한 두 주인공은 확실히 지금 정서와는 도무지 맞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듣기도 어렵지만 과거에는 꽤나 불려졌던 ‘갑돌이와 갑순이’라는 노래가 통했던 시대고 보면 이들의 상황이 작가의 우격다짐은 아닌 것이다.

그 시대라고 되바라진 청춘들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자기 마음을 안으로 꼭꼭 숨기는 것만 할 뿐이다. 왜들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랑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의 사람들은 유난히도 ‘우연히’ 혹은 ‘운명적’ 것에 막연한 희망만 품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인하의 친구이자 전혀 다른 성격인 동욱이 즐겨 쓰는 작업용어가 바로 ‘우연히 다시 만나면’인 것도 작가의 디테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우연에 대해 또 막연히 기다린 것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윤희는 비가 올 때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서 인하가 우산을 씌어주거나 혹은 빌려주게 했다. 민폐 아니냐는 말도 나올 법도 하지만, 사실은 우연히 인하가 다시 우산을 받쳐주기를 기대하는 무모한 행동일 수도 있다.

사랑비가 그려내는 70년대 사랑법은 무모함이다. 사랑이 무슨 죄인 양 무조건 숨기는 것도 무모한 것이고, 자기는 한 발짝도 내딛지 않으면서 상대가 와주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성도 무모한 일이다. 그래서는 예나 지금이나 어찌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70년대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치미는 답답함은 조금만 견디면 된다. 결국 소심남녀의 사랑은 불발로 끝나지만 그 후 40년 후엔 2012년의 사랑이 이어진다. 그래도 70년대 아련한 사랑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여전히 속전속결의 인스턴트 사랑은 아니겠지만 2012년의 서준과 정하나를 보면서도 인하와 윤희는 계속 떠오를 것만 같다. 그것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가슴을 조각내듯이 뱉어낸 한마디에 심히도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거꾸로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하고 말이다.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변할 뿐이다. 사랑비는 그렇게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요즘 시대에게 다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토로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낡아서 먼지 폴폴 나는 이 말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터, 사랑비는 그 사람들을 위한 드라마다.

그러니까 사랑비는 연애가 아닌 사랑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낡고 낡은 사랑이야기다.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라던 김수영 시인의 시구가 새삼스럽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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