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배트맨>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더 배트맨> 스틸 이미지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선거 기간이라 이런 상상을 해본다. 전 세계의 영화감독들에게 ‘반드시 슈퍼히어로 영화를 한 편 만들어야 한다면 어떤 캐릭터를 선택하겠냐’는 투표를 한다면 어떤 캐릭터가 1위를 할까. 아마 압도적인 득표율로 배트맨이 선정되리라 예상한다. 탄생한 지 80년 넘은 장수 캐릭터로 쌓아온 다양한 서사와 인기도 있겠지만, 배트맨의 속성 자체가 창작자들의 도전 의식을 자극하기 딱 적절한 소재인 덕분이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궁극적인 질문은 결국 두 가지로 수렴한다고 본다. 첫 번째는 ‘슈퍼 파워를 어떻게 쓸 것인가’이다. 이는 슈퍼맨이 가진 고뇌이기도 하다. 슈퍼 파워를 버릴 수 없는 그는 대체로 빌런들을 물리치는 데 그의 능력을 쓰지만, 연인인 로이스 레인을 살리기 위해 지구의 자전을 거꾸로 돌리거나(<슈퍼맨1)>, 어머니가 인질로 잡혀 악의 편에 서기도 한다(<저스티스 리그>). 그래서 슈퍼맨의 영화는 그가 어느 편에서 힘을 쓸 것인가가 중심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슈퍼 파워가 필요한가’의 문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슈퍼맨과 달리 후천적 노력(?)으로 슈퍼 파워를 얻은 배트맨은 매 순간 은퇴를 바란다. <다크 나이트>처럼 기꺼이 악역으로 기억되기를 자처하는 이유도 고담의 평화만 유지된다면 당장이라도 슈트를 벗을 각오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수습 기간을 마친 2년 차 배트맨을 다룬 <더 배트맨>도 결국 이 문제와 맞물려 있다. 중요한 건 이를 표현하는 접근 방향이다.

오프닝부터 강렬한 핏빛 배경을 바탕으로 영화 제목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THE BATMAN. 3시간에 이르는 만만찮은 러닝타임을 허락한 제작사 워너브라더스의 야심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사건 해결에 집중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와 달리, 불쌍한 광대 아서 플렉이 어떻게 DC 최악의 빌런 조커로 타락했는지 기원을 따라갔던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처럼 빈틈없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더 파고들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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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웨인, 복수에 진심인 자경단

<더 배트맨>은 ‘세계 최고의 탐정’이라는 배트맨의 설정에 걸맞게 죄악이 만연한 도시에서 범죄의 심연으로 다가가 어떤 진실을 발견하는 탐정영화를 표방했다. 레퍼런스로 언급되는 작품인 <차이나타운>, <세븐>, <조디악>은 탐정영화의 걸작들이다. 이 작품의 공통점은 사건의 핵심에 다가설수록 용의자의 범죄 의도보다 주인공의 내면을 더 깊숙하게 파고들게 되고, 결국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진실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처음 공들이는 부분은 죄악의 도시인 고담의 세심한 표현이다. 기존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을 미치게 만드는 슈퍼빌런들이나 마피아 패거리를 중심으로 한 정경유착에 상대적으로 집중하며 시민들은 피해자의 입장에 가깝게 그려냈다. <더 배트맨>은 좀 다르다. 시장, 경찰청장, 검사처럼 상층부의 부패를 사건의 한 축으로 다루고는 있지만 <조커> 후반부에 도시를 불태우던 폭도들처럼 고담을 지옥으로 만드는 평범한(?) 시민들의 폭력성에도 분명하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차이점이 있다.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은 고담이라는 아수라장을 정리하기 위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담장을 치고 안락한 성안에서 지내면 그만이다.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활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복수심이다. 부모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가 배트맨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추가로 선한 의지를 보였던 아버지의 유산을 잇겠다는 다짐 정도. 활동한 지 2년 남짓 된 초보 배트맨에게 행운이 있다면 그의 복수심이 공적 정의와도 부합했다는 점이다.

<더 배트맨>의 배트맨은 다행히 불살의 원칙까지는 지키고 있지만, 영구적 장애가 걱정될 정도로 과격하게 범죄자를 진압한다. 오랫동안 배트맨의 성격을 특징해 온 자경단이라는 설명보다 감정적으로 사적 제재를 가한다는 표현이 이 작품에서는 더 어울린다. ‘나는 복수다(I’m vengeance)’라는 대사는 사적인 복수를 공적인 정의와 겹쳐놓고 자기만족을 얻는 배트맨의 태도를 함축한다.

배트맨의 이런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따라가며, 영화가 추구하는 배트맨에 대한 깊은 탐구는 다른 두 인물을 통해 보완된다. 바로 리들러(폴 다노)와 캣우먼(조이 크래비츠)이다. 셋은 모두 고아 출신으로 가면을 쓰고 불법적인 활동을 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놀랍게도 극 중에서 리들러와 캣우먼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수수께끼를 내는 연쇄살인마 에드워드 내쉬튼, 수트를 입은 날렵한 도둑 셀리나 카일이 있을 뿐이다. 굳이 이름이 필요 없는 까닭은 이 둘이 브루스 웨인의 ‘IF’에 해당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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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러와 캣우먼, 배트맨의 절망과 희망 편

<더 배트맨>은 누군가 망원경을 통해 어떤 저택을 살펴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관객은 처음에 이게 리들러인지 배트맨인지 알 수 없다. 마침 저택 안에서 닌자 복장으로 장점을 들고 있는 괴한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곧 할로윈 분장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지지만, 망원경으로 집안을 관찰하는 모습은 배트맨에게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아서 플렉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고 지독하게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됐던 <조커>와 달리 <더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시점에서 벗어난다.

리들러가 처벌하는 인물들의 면면도 살펴보자. 마피아와 관계가 있는 시장, 경찰청장, 검사들이다. 만약 배트맨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 이들을 처벌했어도 무리 없는 위선자이자 죄인이다. 리들러가 살인이라는 잘못된 처벌 방식을 택하지만 않았다면 또 다른 안티히어로의 범주로 분류해도 관객은 납득했을 것이다. 또한 원작 팬들의 기대와 달리 리들러가 던지는 수수께끼는 그가 일으키는 범죄의 결정적 단서가 아니라 웨인 가문의 비밀을 폭로하는 증거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는 배트맨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고민을 하게 만든다.

물론 이 질문은 배트맨의 IF인 리들러에게도 적용된다. 웨인 가문의 비밀이 밝혀진 후 브루스 웨인은 깨닫는다. 자신의 사적인 복수심으로 행해왔던 악에 대한 응징이 사실은 공적인 정의와 동떨어져 있었고 또 다른 범죄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노의 범위와 대상을 재설정한 배트맨은 영웅의 길로 나간다. 이런 깨달음이 없는 리들러는 여전히 자신의 정의를 혼동하고 추종자들을 통해 시스템의 붕괴를 주도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빌런의 나락으로 빠진다.

‘캣우먼’이라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셀리나 카일은 배트맨, 리들러와는 다르다. 배트맨은 리들러가 낸 수수께끼와 알프레도(앤디 서키스), 팔코네(존 터투로)와의 대화를 통해 웨인 가문의 진실과 그로 인해 피해를 본 리들러의 고통은 알게 되지만 끝까지 부모의 사망원인이 밝혀지지 않는다. 리들러가 겪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웨인 가문 때문만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토마스 웨인이 자신의 죄를 감추려 했든 어쨌든 그의 선행이 완전히 빛을 바래는 건 아니며, 그의 죗값을 아들에게 묻는 건 연좌제일 뿐이다.

셀리나는 셋 중 분노의 대상과 피해 범위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녀가 팔코네에게 복수를 행하지 못하는 건 애증 관계라는 점도 존재하지만, 고담을 좌지우지하는 거악인 이유도 크다. 우연히 복수의 기회가 생겼을 때 영웅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배트맨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리들러와 같은 살인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상에서 캣우먼은 유일하게 원한이 해소되었기 때문에 고담에 머물 필요가 없다. 캣우먼의 자연스러운 퇴장은 이미 고담 그 자체가 되어버린 배트맨과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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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vengeance. I’m night. I’m the batman.

<더 배트맨>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사건이 벌어지는 시점이다. 배트맨의 초보시절이기도 하지만 고담 시장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조커>에서도 아서 플렉이 조커로 각성하는 시점이 바로 토마스 웨인이 선거에 출마한 시점이다. 두 작품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공식설정은 없고 공통으로 등장하는 토마스 웨인이 동일 인물도 아니지만 ‘선거’라는 테마는 여전히 놓치지 말아야 할 테마다.

리들러에게 암살된 전직 시장에 맞서 ‘A Real Change’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젊고 개혁적인 성향의 20대 흑인 여성 벨라 레알이 고담의 새로운 시장으로 당선되고 리들러는 체포되어 아캄 수용소에 갇힌다. 보통의 슈퍼히어로 영화였다면 이 부분에서 끝났을 테지만 리들러의 테러 계획은 온라인을 통해 형성된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실행된다. 선거로 대표되는 제도권 정치에 믿음을 잃은 일부 시민들에게는 누가 시장으로 당선되든 무의미하다.

리들러와 추종자들은 방파제를 터트려 홍수를 일으키고 스타디움에 피신한 시민들에겐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때마침 등장한 배트맨과 캣우먼 그리고 고든을 비롯한 경찰들은 격렬한 전투 끝에 폭도들을 제압한다. 겉으로 보기에 바뀐 건 없다. 홍수로 도시의 기반시설이 파괴됐고 배트맨은 여전히 가면을 쓴 불법적인 자경단이다. 어둠 속에서만 나타나 범죄자를 과격하게 응징하던 배트맨이 이제는 조명탄을 꺼내 들고 진창에 빠진 시민들을 구출하고 동이 틀 때까지 그들을 보살핀다.

‘나는 복수다(I’m vengeance)’ 뒤에 두 개의 문장이 더 붙어야 배트맨의 유명한 대사가 완성된다. 그 문장은 이렇다. 나는 밤이다. 나는 배트맨이다(I’m night. I’m the batman). 강렬한 핏빛으로 배경의 오프닝 뒤에 THE BATMAN이란 제목이 떴음을 기억하자. 어둠 속에서 불붙인 조명탄은 지평선 너머 떠오르던 태양과 같은 핏빛 붉은색이었다는 것도 함께. 길을 잃었던 복수는 짙고 어두웠던 밤을 거쳐 고담의 영웅 배트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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