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쓸모없음을 말한다. 무엇이 쓸모없다는 것인가. 바로 언어적 표현과 대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도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결을 갖고 있다. 하지만 류스케 감독은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나침반 삼아 자칫 냉소와 회의라는 함정을 피해 타인을 향한 연민과 삶에 대한 의지라는 길로 인도한다.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 마찬가지로 배우이자 작가인 오토. 각자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누리는 중년 부부지만 하나뿐인 아이가 3일 만에 세상을 떠난 23년 전의 아픔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둘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아이가 떠난 후 오토는 특이한 습관이자 비밀이 생긴다. 관계 중 절정에 달하면 신들린 듯 신기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다.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오토를 위해 가후쿠는 그 이야기를 메모하고, 오토는 그 메모로 소설을 써낸다.

오토는 또 하나의 비밀을 갖고 있다. 오토가 배우로서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상대 배역의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가후쿠는 불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후쿠는 심지어 자기의 집 안에서 남자와 관계하는 장면을 봤음에도 오토와 불륜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 10년 넘게 타고 있는 빨간색 사브900을 끌고 정처 없이 돌아다닐 뿐이다.

가후쿠는 오토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짝사랑하는 남학생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여학생의 이야기다. 여학생은 몰래 들어간 남학생의 방에서 기념품으로 물건을 훔쳐 오고, 세리머니처럼 자신의 물건을 방안에 숨겨놓는다는 내용이다. 오토는 할 말이 있으니 저녁 때 집에서 보자는 당부까지 한다. 찜찜한 마음을 품고 집을 나선 가후쿠는 연극 연습으로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고 뇌출혈로 쓰러진 오토를 발견한다. 곧바로 화면은 오토의 장례식으로 연결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 이미지

체호프의 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몸을 움직였다

오토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무려 40분에 달하는 프롤로그가 끝나고 나서야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제목이 뜨고 2년 뒤로 시간이 흐른다. 2년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청받은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게 된다. <바냐 아저씨>는 오토가 죽은 무렵 가후쿠가 ‘바냐’ 역을 맡아 활동한 작품이기도 하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드라이브 마이 카>와 강하게 밀착시켜 주제의 깊이를 더하는 감독의 노련함이 이제부터 서서히 드러난다.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는 현재의 삶이 불만족스럽다. 누이의 남편이자 교수인 매제 세레브라코프를 뒷바라지하느라 보낸 젊은 세월이 헛수고처럼 느껴진다. 지식인인 줄 알았던 세레브라코프의 위선과 무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제의 현재 부인인 옐레나에게 품은 연심도 깊어간다. 얼핏 봐도 바냐와 가후쿠는 공통점이 많다. 그래서 가후쿠는 오토의 사후 바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대사를 할수록 자신이 끌려 나오는 것 같다는 이유다. 히로시마 연극제에서 연출만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런 심리적 배경이 깔린 상황에서 가후쿠가 연출하는 <바냐 아저씨>에서 캐스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아스트로프역으로 오토의 내연남이었던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가 지원한 일이다. 극에서 아스트로프는 바냐의 친구로 우정을 나누지만, 옐레나를 사랑하는 연적이기도 하다. 오토라는 여성으로 엮인 두 남자의 상황과 묘하게 일치하는 상황에서 가후쿠는 다카츠키를 갑작스레 바냐 역으로 캐스팅한다.

두 번째는 소냐 역으로 지원한 한국에서 온 무용가이자 배우 유나(박유림)와의 만남이다. 언어장애가 있는 유나는 들을 수 있지만, 대화는 한국어 수어로만 가능한 농인이다. 그녀가 맡은 소냐는 바냐의 조카로 아스트로프를 좋아하지만 새엄마인 옐레나에게 빠진 그에게 제대로 된 고백도 하지 못한 채 좌절에 빠진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옐레나와의 우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바냐를 위로하며 용기를 불어넣는 강인한 캐릭터다.

가후쿠는 우연한 기회에 유나의 집을 방문하고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소냐 역을 지원한 이유에 대해 유나 역시 아이를 잃은 경험을 고백한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절망에 빠져 무용도 그만두게 된 상황에서 유나는 체호프의 글을 만났다. 그런데 ‘대사를 할수록 자신이 끌려 나오는 것 같아’서 바냐 역을 포기한 가후쿠와 달리, 마치 바냐를 위로하는 소냐처럼 ‘체호프의 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몸을 움직였다’고 말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 이미지

타인을 온전히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내 몸을 통과한다’는 유나의 말은 가후쿠의 특이한 연출 방식의 핵심과도 맞닿은 문장이다. 가후쿠는 다양한 국가의 배우들을 캐스팅해 한국어, 일어, 중국어, 베트남어, 수어까지 최소 다섯 가지의 언어가 섞인 방식으로 <바냐 아저씨>를 연출한다. 대본 연습을 할 때는 배우의 감정이입을 차단하고 주어진 대사를 무미건조하게 읽게 시킨다. 꽉 막힌 언어의 장벽을 타고 넘어갈 감정의 교류까지 원천차단한 연습에 대해 ‘마치 불경을 듣는 것 같다’는 배우들의 볼멘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연습이 계속되자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 감정을 담은 첫 실습에서 유나는 옐레나 역을 맡은 재니스(소냐 위엔)와 대사를 주고받는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재니스,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지만 마치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듯 자연스러운 감정이 피어오른다. 그렇다고 유나가 타인과의 소통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내 말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건 내게는 평범한 일’이라며 소통의 불가능을 일찌감치 수용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워질수록 내면에서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던 이유일 것이다.

유나가 연극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의 무용론을 증명했다면 다카츠키는 오토가 남긴 이야기를 전하며 유나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전한다. 남학생의 집에 몰래 드나들던 여학생은 어느 날 또 다른 침입자를 만나고 그의 눈을 찔러서 죽인다. 곧 자신의 행각이 발각되고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생길 거라 예상과는 다르게 남학생은 평소처럼 행동할 뿐이다. 엄청난 범죄가 일어났지만, 남학생의 집에 CCTV가 설치된 일 빼고는 세상에 아무 변화도 없이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는 모호한 결말.

자신의 불륜을 인지했지만 가후쿠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행동하기 때문에 불안하던 오토의 내면이 반영된 것 같은 이야기를 전하며 다카츠키는 말한다. 타인을 온전히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니 자기 자신을 이해하라고. 연극에서는 내면의 변화를 통해 배우들의 특별한 변화를 끌어내던 가후쿠지만 정작 자신은 오토와의 관계만을 생각해왔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던 걸까. 다카츠키가 부득이하게 연극에서 탈락한 직후 바냐 역을 맡을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드라이버 마사키(미우라 토코)와 함께 그녀의 고향 훗카이도로 떠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 이미지

사브900과 무중력 상태의 미사키

미사키는 연극과 이야기를 뛰어넘어 현실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쓸모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캐릭터다. 과묵함을 넘어 대화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묻지 않으면 먼저 말을 건네는 법이 없고 목적지와 시간 같은 업무적 대화만 주고받는다. 차 밖에서 묵묵히 책을 읽고 담배를 피우는 걸로 지루한 대기시간을 보낸다. 운전 스타일도 그렇다. 가후쿠가 아끼는 올드카 사브900의 운전을 끝내 미사키에게 맡긴 이유도 엔진음도 들리지 않고 마치 중력이 없는 듯 고요한 테스트 드라이빙의 결과 덕분이었다.

사실 가후쿠가 몰고 있는 사브900는 이미 무중력 상태와 유사하다. 가후쿠는 운전 중에 녹음테이프를 틀어놓는 습관이 있다. 테이프에 담긴 건 오토가 낭독한 연극의 대본이다. 역시 감정이 배제된 녹음 파일에는 가후쿠의 대사 부분만 공백이라 가후쿠의 리듬으로 대사를 하면 딱 다음 대사와 타이밍이 맞는다. 미사키와 대화하는 중반부가 지나기 전까지 차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오토의 목소리와 가후쿠의 대사뿐이다. 이런 차를 타인에게 맡기는 게 가후쿠 입장에서 처음엔 탐탁지 않음은 당연하다. 미사키는 무중력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 특유의 과묵함으로 가후쿠의 허락을 얻어냈다.

자동차 바퀴가 테이프로 디졸브 되는 순간이 있다.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연출이 절제된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유일하게 시각효과가 쓰인 부분이다. 오토의 한자 이름은 소리를 뜻하는 ‘音’이다. 죽은 이의 목소리가 담긴 가후쿠의 사브900은 장송곡을 틀어놓은 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후쿠와 함께 세 번의 변화를 겪으며 죽은 자의 목소리만 들리던 사브900은 관이 아니라 자동차 본연의 역할로 돌아온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 이미지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이야기

첫 번째 변화는 유나의 집을 방문한 이후부터다. 자신과 다르게 체호프를 받아들인 유나의 태도를 본 뒤 가후쿠는 미사키의 운전을 처음으로 칭찬한다. 두 번째 변화는 다카츠키가 오토가 남긴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었을 때다. 자신을 이해하라는 말을 듣고는 처음으로 조수석에 앉는다. 뒷좌석에서 운전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고용주가 아니라 미사키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동등한 관계에서 둘은 사브900을 몰고 긴 여정 끝에 홋카이도에 도착한다. 미사키가 살던 집터에서 가후쿠는 세 번째 변화의 계기를 듣게 된다. 미사키는 중학생 때부터 술집을 운영하던 엄마에게 학대를 당하며 운전을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미사키를 폭행한 후에는 항상 또 다른 인격으로 변했는데 8살 아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사태가 나서 집이 무너진 날, 미사키는 엄마를 놔두고 홀로 폐허를 빠져나온다. 미사키는 두고 온 엄마보다 엄마의 또 다른 인격이 더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미사키의 이야기를 들은 가후쿠도 묻어놨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오토가 할 말이 있다고 했던 날, 관계의 변화가 두려웠던 가후쿠는 일부러 집에 늦게 들어갔다. 오토의 뇌출혈이 그의 탓은 아니지만, 일찍 들어갔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지 충분히 화내지 못했고 이제는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뒤늦은 후회를 격렬하게 표현한다.

미필적 고의와 유사하게 사랑하지만 미워했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싶으나 영원히 기회를 잃은 둘은 서로를 껴안고 말한다. 너를 이해한다가 아니라,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영원히 소통할 수 없는 타인을 쉽사리 이해한다고 말하는 대신, 내면에 담아놨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답을 찾기 위해 멀리까지 떠나야 했던 둘이 답을 찾은 후 돌아오는 길은 굳이 카메라에 담을 필요는 없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스틸 이미지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당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화면이 바뀌고 무대 위. 가후쿠는 기어이 바냐 역을 맡고 극이 진행된다. 무대에서 퇴장한 재니스를 따라온 카메라는 분장실에 설치된 TV를 비추고 이내 중계가 시작된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연극 관객의 지위를 획득한다.

유나의 소냐는 가후쿠의 바냐에게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를 말한다. 사실 희곡을 몰라도 이 대사를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오토가 죽던 날, 일찍 집에 들어가지 않고 주차장에서 사브900에 앉아있던 장면에서 바냐가 듣던 오토의 목소리가 이 대사를 말하던 중이다. 그렇게 영화 곳곳에서 분절되어 나오던 대사는 이제야 자리를 찾아 작은 램프가 흔들리는 탁자 앞에서 말해야 할 사람의 손을 거쳐 들어야 할 사람의 눈으로 대사가 전해진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앞선 대사가 끝나고 카메라는 객석의 미사키를 잡는다. 객석의 미사키는 사실상 영화관객인 우리의 위치에서 연극을 본다. 이 카메라를 통해 지식인 중년남성의 뻔한 각성으로 끝맺음했을지도 모를 영화는 기어이 한 번 더 액셀을 밟으며 걸작의 위치로 나아간다.

다시 한번 시간이 흐른 후. 미사키는 일본이 아닌 부산의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보고 있다. 무너진 집을 빠져나오며 얻은 뺨의 상처는 말끔히 사라진 상태다. 한아름 짐을 들고 빨간색 사브900의 운전석에 오른다. 뒷자리에는 유나가 키우던 강아지가 함께다. 영화와 연극을 통해 기어이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던 가후쿠의 이야기는 끝났다. 운전하라(drive my car)는 고용주 명령이 아니라, 내 의지대로 내 차를 운전하는(drive my car) 오너 드라이버가 된 미사키 앞에는 화창하게 갠 해운도로가 길게 뻗어있다. 미사키의 이야기, 같은 자리에서 가후쿠의 <바냐 아저씨>를 관람한 우리의 이야기도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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