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칼럼] 라디오는 핵심 재난매체다. 내 손안 스마트폰에 수시로 재난정보가 전달되는 고도로 정보화된 시대라고 하지만, 재난매체로서 라디오의 중요성은 여전히 퇴색되지 않았다. 재난은 언제 어떤 형태와 규모로 다가올지 모른다.

라디오는 통신망이 두절되더라도 굳건한 시스템으로 안정적인 서비스가 가능하다. 자동차 내에 있거나, 배터리로 작동되는 작은 수신기만 갖고 있다면 통신망이 일거에 무너진 엄혹한 상황속일지라도 라디오는 접속자수 제한 없는 무한대의 청취자에게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재난정보와 행동요령을 전달할 수 있다. 전국의 라디오 방송사들은 이러한 핵심 재난매체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치면 역효과가 나기 마련이다. 음성미디어라는 라디오의 특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정부의 재난방송 실시기준이 방송사와 청취자를 모두 곤란에 빠뜨리고 있다. 라디오는 하단 자막이나 화면 분할 등의 방식으로 본 방송의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고도 재난 상황을 전달할 수 있는 TV와는 완전히 다른 매체적 특성을 갖는다. 라디오는 재난방송을 하려면 진행 중이던 본 방송을 중단해야만 한다. 따라서 정말 긴급하고 중요한 재난정보가 적절한 순간에 임팩트있게 제공되어야 소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반대로 시급성이 떨어지는 재난정보를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자주 전달할 경우에는 도리어 청취자의 주목도를 떨어뜨리고 심하게는 라디오를 기피하게 하는 역효과까지도 불러올 수 있다.

이미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현행 규정에는 진행 중이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즉시 재난 상황을 전달해야 할 만큼 시급한 재난 상황인지를 판단하고 적용할 수 있는 합리적 시행기준이 전혀 없다. 재난방송을 요청받는 방송사는 지체 없이 이를 시행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과 이를 어길 시 TV와 동일하게 1,5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 받는다는 벌칙 조항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산불, 태풍, 지진, 호우, 대형 안전사고 등 청취자의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즉각적으로 생길 수 있는 긴급재난은 재난정보가 도착하는 즉시 재난방송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일정기간 주의를 당부하는 전염병 방역, 가뭄, 적조, 폭염, 한파 등 긴급성을 요하지 않는 완만진행형 재난까지도 진행 중인 방송을 끊고 즉시 전달하라는 것이 정부가 강제하고 있는 현행 규정이다. 이렇게 긴급성 여부가 고려된 합리적 세부 시행 기준이 없는 탓에 지금도 라디오 방송사는 무조건 정부부처의 요청이 올 때마다 진행 중이던 방송을 중단하고 재난정보를 ‘즉시’ 전달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고, 청취자들 또한 청취 흐름이 툭툭 끊기는 것을 견뎌야만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라디오 진행자가 읽어내야 하는 재난정보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길어 방송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청취자들의 피로도를 증가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미세먼지처럼 우리나라의 상당 지역에 해당할 만큼 발생규모가 큰 재난이라도 경보가 발효된 시군 단위까지 하나하나 진행자가 토씨하나 틀림없이 읽어야 하고, 그 긴 정보를 청취자들은 멍하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참으로 넌센스같은 일이다. 음악프로그램을 듣다가 갑자기 방송이 뚝 끊기고 급하지 않은 길고 디테일한 재난정보가 음성으로만 수 분 동안 진행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상당수의 청취자는 아마 망설임없이 라디오의 전원을 끄고 말 것이다.

라디오 방송사들은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개선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재작년부터 유관정부부처에 제도 개선을 요구해왔다. 재난의 긴급성에 따른 재난방송 시행 기준을 차별화하고, 음성만으로 전달하기엔 지나치게 자세한 재난지역명을 광역단위로 짧게 호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달라는 합리적 요청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정부에서는 유관부처 간 이견을 이유로 이러한 합리적 요청을 뭉개고 있다. 한파, 폭염, 건조에 대해서만 재난지역명을 광역화해 호명할 수 있게 규정이 일부 개정된 것이 개선사항의 전부다.

청취자들은 평상시 라디오를 통해 휴식과 즐거움, 정보를 얻는다. 그러다 긴급히 대처해야 할 재난이 발생했을 때 관련 정보를 신속히 얻고 이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재난방송의 본 기능일 것이다. 라디오에서 이러한 취지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빠른 제도 정비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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