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놀러와에 영화 ‘화차’ 홍보차 변영주 감독과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가 출연했었다. 그때 김민희는 어린아이처럼 칭찬받는 것이 너무 좋다고 천진한 모습을 지어보였다. 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때 김민희의 모습에서 화차 강선영 아니 차경선을 찾을 수 있다. 영화를 보고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이 영화는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대단히 억세다. 재미를 떠나서, 거의 끝날 즈음까지 정신을 쪽 빨아 당겼다. 어차피 개봉 초기의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줄거리를 소개하는 일은 대단히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말을 아끼기로 하지만, 평소에 산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일지라도 화차를 보는 동안은 하품하는 일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액션이나, 침을 꿀꺽 삼킬 만한 야시시한 장면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큰 것은 스토리의 힘이다. 시나리오 작업에 3년이나 매달렸다는 변영주 감독의 말이 괜한 엄살이나 과장은 아닐 듯싶었다. 그 다음으로는 배우 3인의 몫이다.

처음에는 조성하의 색다른 변신이 흥미로웠다. 비리로 잘린 퇴직 경찰 역을 맡은 조성하는 전작인 황해와는 또 전혀 다른 색깔을 보였다. 다분히 껄렁하고 통속적인 모습에 다소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배우의 변신은 무죄일 뿐만 아니라 칭찬받을 일이다. 역시 좋은 배우다.

극중에서 조성하와 이선균은 사촌지간이다. 곧 취직을 앞둔 조성하가 왜 끝까지 이 사건을 뒤쫓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레이션은 없다. 그 점은 추격이 계속되면서 관객이 스스로 읽어내야 할 부분이다. 감독은 영화에 관객의 몫을 많이 남겨두어서 그 여백을 어떻게 매우냐에 따라 이 영화의 재미는 차등을 보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선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불과 한 달 남겨둔 상태에서 결혼할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황당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분화된 우리 사회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막상 따져보면 아는 것이 없다는 쓸쓸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당사자 이선균이 왜 이 여자를 용서 혹은 포기하냐에 대한 숙제도 관객 스스로 풀어야 할 부분이다.

끝으로 김민희다. 화차가 개봉한 후로 김민희에 대한 말들이 많다. 데뷔 초기 발연기 논란을 달고 살았던 김민희를 다 잊지 못했기 때문에라도 더 할 수 있다. 그런데 김민희의 연기를 보기 전에 감독의 설명이 좀 필요하다. 그 설명을 듣고 난 후라면 김민희의 연기에 좀 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중심, 선영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김민희는 이선균과는 또 다른 숙제를 갖고 있었다. 선영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이 아니라 연결된 상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그녀를 궁금해 하고 논하는 추적자들에 의해 파편으로 접합되는 모습인 선영은 배우 입장에서는 연기의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 역할이다. 김민희는 지금 표현해야 할 연기의 감정만을 움켜쥐어야 했다. 그녀에겐 그 앞과 뒤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매번 그녀의 등장은 순간적이고 찰나적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변명 같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보면 실제로 그렇다. 사실 연기하는 김민희가 아니라 이 설명은 관객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가 죽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딸의 모습과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를 토막 내면서 정신분열의 상태에 빠지는 그녀를 보게 되는데, 옷태 좋은 패셔니스타가 아니라 사이코패스와 백치 사이의 종이 한 장 차이의 눈빛을 해독하는 데 필요한 설명이다.

화차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사회적 가치의 몰락이 가져온 개인 실존의 소멸. 이선균 캐릭터의 이유도 여기에 해답이 있다. 어떤 판단을 요구하지 않지만 이 영화는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에 못지않은 사회적 이슈를 스크린 깊숙이 감추고 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